쥐가 먹었다며 속이고 공물 가로채 탐관오리 소금 먹여 엄벌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친'인척 측근 비리와 관련,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생각할수록 억장이 무너진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다"고 했다. 저축은행 비리와 관련해 친형 이상득 전 국회의원을 비롯해 청와대 공무원들까지 뇌물 사건에 연루되자 국민 앞에 머리를 숙였다.
언론에는 공직자들이 뇌물을 받아 사법기관으로부터 단죄를 받는 기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실린다. 지난해 민간기구인 국제투명성기구에서 조사한 우리나라 국가 청렴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27위로 하위권을 맴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상한 것은 예전에는 사회 지도층에서 죄를 짓고 사법기관에 불려 가면 얼굴을 가리고 쥐구멍이라도 찾는 시늉을 했는데 요즘은 뻔뻔하기 그지없다. 일부 몰상식한 양반(?)은 정치적 탄압이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기도 한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아는 일(天知地知子知我知)인데도 우선 발뺌부터 한다. '뇌물 공화국'이란 부끄러운 말이 회자된 지도 오래다. 이런 세태를 지켜보면서 청백리 중 청백리로 꼽히는 김천 선비 노촌(老村) 이약동(李約東'1416~1493) 선생을 떠올리게 한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잡지 '청춘'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청렴결백한 관리로 노촌 이약동을 꼽았다. 이약동은 제주목사로 있으면서 부패를 근절하고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펼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약동은 1470년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예로부터 제주도에서는 매년 2월 백록담에서 산신제를 올리고 있었다. 제사 때가 되면 많은 백성들이 동원돼 며칠씩 제사를 준비해야 했다. 날씨가 춥고 한라산을 오르는 길이 험해 제물을 지고 올라가는 백성이 얼어 죽거나 사고를 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약동이 부임해 이런 폐단을 알고 산천단(山川壇)을 한라산 중턱 아라동 현 위치에 옮겨 산신제를 지내게 했다. 이후 산신제 때문에 고통을 겪는 백성들이 없어졌다고 한다. 아라동 산천단 옆에 '한라산신선비'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현재 묘단 옆에 세워진 '한라산신고선비'와 동강 난 기적비들은 조선시대 말 이후에 지방 유지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다.
◆공물을 탐한 탐관오리를 소금을 먹여 단죄하다.
이약동은 제주목사 부임 후 각종 공물과 세금에 관한 문서들을 검토하던 중 서류에 비해 물품이 현저하게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관아의 일을 보던 하급관리들이 중간에 공물을 가로채 자신의 배를 불리는 일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부패를 뿌리 뽑기로 했다.
그는 관리들을 불러들여 추궁했다. "장부상 공물이 어디로 갔기에 비어 있고 맞지 않느냐?" 묵묵부답이다. "아마 쥐가 먹은 것 같습니다." 한참 추궁을 하자 얼토당토않은 답변이 나왔다. 이에 이약동은 "그럼 구운 소금도 쥐가 먹어 없어진 거냐?"고 재차 물었다. "그렇지요. 사또! 이곳은 쥐가 많아 없어지는 양도 상당합니다."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들은 이약동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많은 소금이 없어지려면 도대체 제주도에 얼마나 많은 쥐가 있으며 얼마나 큰 쥐가 있단 말이냐? 이 쥐들은 필경 너희들이렷다!" 크게 노한 그는 관리들을 모두 모이게 한 뒤 입에 소금 한 바가지씩을 처넣었다고 한다.
"너희 같은 큰 쥐들이 소금 한 바가지도 먹지 못하는데 새앙쥐들이 대체 얼마나 먹을 수 있단 말이냐? 입안에 소금을 먹지 못한다면 너희가 중간에 공물을 가로챈 것으로 알고 큰 벌을 내릴 것이다"고 했다. 관리들은 결국 소금을 먹지 못했고 큰 벌을 받았다. 이 사건 후 제주도에서는 관리들이 중간에서 공물과 세금을 가로채는 일이 없어졌다고 전한다.
◆괘편암(掛鞭岩)과 투갑연(投甲淵)의 의미는
이약동의 선정(善政)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가 제주목사로 있는 동안 백성들이 선정에 감사하는 마음에 송덕비를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이약동은 이를 마다하며, 어떤 선물도 받지 않았다. 그는 임기를 마치고 제주를 떠날 때 재임 중에 착용했던 의복이나 사용하던 기물을 모두 관아에 남겨두고 떠났다. 그런데 말을 타고 성문에 이르렀는데 자신 손에 말채찍이 들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채찍도 공물이라며 성루에 걸어두고 떠났다. 그 후 후임자들은 채찍을 치우지 않고 오랫동안 그대로 걸어놓고 교훈으로 삼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채찍이 썩어 없어지자 백성은 바위에 채찍 모양을 새겨두고 이를 괘편암(掛鞭岩)이라 했다.
또 이약동이 목사직을 무사히 마치고 제주도를 떠나 육지로 향할 때 일이다. 항해 중에 갑자기 광풍이 불고 파도가 일어 배가 빙빙 돌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사공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벌벌 떨고만 있었다. 그러자 이약동이 수하들을 불러 물었다.
"나는 이 섬에 와서 한 가지라도 사리사욕을 취한 것이 없다. 우리 중 누군가가 부정을 저질러 신명이 노한 것이 아닌가. 일행 중 누구라도 섬의 물건을 챙겨온 자가 있으면 내놓아라."
일행이 우물쭈물하다가 말을 했다. "고을 백성이 사또님을 위해 바친 금갑옷을 실어두었습니다. 나중에 갑옷을 입으실 일이 있으면 드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이에 이약동은 "그 정성은 내가 잘 알았으니 갑옷을 바다에 던져라"고 했다. 갑옷을 바다에 던지자 즉시 파도가 그쳤고, 곧 배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갑옷을 던졌던 곳을 '투갑연'(投甲淵'갑옷을 던진 물목)이라고 부르고 생사당(生祠堂'백성들이 고을 수령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살아 있는 동안 모시던 사당)을 지어 모셨다.
◆고향 하로마을에는 청백리를 기리는 서원 세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에 노촌 선생을 모신 김천 양천동 '하로서원'(賀老書院)을 찾았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아름드리 소나무가 서 있고 차례로 비석 4기가 서 있다. 선생을 기리기 위한 신도비와 산천단 유적비 등이다. 이 중 산천단 유적비는 제주도에서 가져온 돌로 조성했다. 이약동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목민관인들이 공을 잊지 못해 직접 제주도에서 돌을 가져와 세운 비다.
신도비를 지나면 길 건너편에 관리들이 관복을 입을 때 머리에 착용하는 사모(紗帽)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는 원래 황악산 끝자락인 모암산 절벽에서 하로마을을 보고 있었다. 사모 형상을 한 바위의 정기를 받아 하로마을에서 고관들이 대거 배출돼 이들이 수시로 고향을 내왕하니 수발을 들어야 하는 역리들이 번거로움을 면할 요량으로 바위를 깨뜨렸다. 바위가 깨어진 뒤 마을이 침체되자 주민들이 나서 사모바위를 하로마을 앞으로 옮겨 정성으로 모시고 있다.
마을 입구에 들면 단정하게 조성된 하로서원을 만난다. 이약동 선생은 처음에는 점필재 김종직, 매계 조위, 동대 최석문, 남정 김시창 등 5현과 함께 경렴서원에 모셔졌는데 이 서원은 고종 때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 1984년 지역 유림과 문중에서 나서 지금 자리에 하로서원을 중건하고 청백사(淸白祠)를 지어 이약동 선생을 모셨다.
노촌 이약동은 1416년(태종 16년) 지금의 김천시 양천동 하로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약동(藥童)이라 했는데 이는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한 모친이 금오산 약사암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끝에 얻은 아들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26세 때인 1442년(세종 24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랐다. 사헌부 감찰, 청도군수를 거쳐 제주목사, 전라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73세에 청백리(淸白吏)로 뽑혔다. 말년에 고향인 하로마을에서 여생을 보냈다. 시호는 평정(平訂)이다. 그는 76세에 낙향할 때 비가 새는 초가집 한 채가 전부였고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난했다. 그는 유산으로 아들에게 아래 시(詩) 한 수를, 부인에게는 쪽박 하나와 질그릇 하나를 주었다고 한다.
살림이 가난하여 나누어줄 것은 없고(家貧無物得支分)
있는 것은 오직 낡은 표주박과 질그릇뿐일세(惟有簞瓢老瓦盆)
주옥이 상자에 가득해도 곧 없어질 수 있으니(珠玉滿籯隨手散)
후손에게 청백하기를 당부하는 것만 못하네(不如淸白付兒孫)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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