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창] 말이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입력 2012-08-06 07:46:03

솔제니친이 쓴 '암병동'에 암 환자들이 회진하러 오는 의사들을 맞을 때 느끼는 감정을 쓴 구절이 있다. '흰 가운을 입은 몇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올 때 환자들의 마음은 언제나 경계와 공포 그리고 희망이 용솟음치듯 일어났다. 이 세 가지 감정은 가운이나 캡이 희면 휠수록, 얼굴 표정이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더욱 더 강해진다.'

다인(多人) 병실에 담당 환자가 있어 회진을 하고 돌아서는 순간 맞은 편에 내 환자처럼 보이는 분이 보인다. 그쪽으로 다가가려고 하니 수련의가 "그 환자는 교수님 환자가 아닙니다"라고 해서 "아, 그렇군"하며 돌아선다. 그때 의식도 흐릿한 상태로 누워 계시던 할아버지가 얼굴에 실망스런 표정을 가득 띠시고, 간병하고 계시던 할머니는 눈길에 서운한 감정을 가득 담는다.

순간 얼마 전에 경험했던 일이 떠오른다. 15여 년 전에 뇌동맥류가 파열돼 수술하고 최근 다른 부위에 동맥류가 새로 생겨 수술해 드린 할머니가 있다. 퇴원 후 "밥맛이 없고 힘이 없다, 수술이 잘못돼 그런 것이 아니냐?"고 하시던 할머니를 "활동을 좀 하시면 입맛도 돌아오고 힘도 생길 겁니다"하고 달래고 있던 중이었다. 곁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내가 교수님한테 감정이 많습니다"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뜨악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매가 처음 수술 받을 때 얼마나 중했습니까? '죽지나 않을까'하고 마음 졸이고 있는데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어느 날, 교수님이 회진을 와서 '집에 가라'고 하지 않았었습니까? '아, 할매가 가능성이 없어 집에 가라고 하는 모양이구나'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다음 날 또 회진 와서는 '왜 집에 안갔지?'하고 물어서 가슴이 철렁했었습니다."

그랬었나? 15여 년 전 기억인데 아물아물하고,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내려왔다면 희망이 없어 집에 가라고 했지는 않았을 텐데. 만일 그런 말을 했다면 환자가 퇴원해도 될 만큼 회복된 상태였을 것이다.

"그렇게 교수님이 내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어놓고 저한테 한 번도 사과를 하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감정이 많은 겁니다." 아, 그 정도 일이라면. "할아버지, 제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그렇게 기억하고 계시니 사과를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할아버지는 만족하신 듯 할머니를 모시고 외래 진료실을 나가셨다. 사소한 말이라도 어떤 경우는 오해돼 남의 가슴 속에 평생 한으로 남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다음 회진 때에는 "아, 그렇군"하며 돌아섰던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손이라도 한 번 잡아드려야겠다. 혹시 그 할아버지도 "아, 그렇군"하는 말을 평생 한으로 가슴에 담고 살아가실지도 모르니까.

임만빈 계명대 동산의료원 신경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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