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세대가 사회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 자기 개성을 표현하는 음악 장르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1970년대 미국 히피들은 록(rock) 음악을 통해 반전, 인종차별 반대 등의 목소리를 냈다. 장발, 청바지 등과 함께 록 음악은 개성을 표현하는 패션이기도 했다. 1980년대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민중가요 노래패를 구성해 노동'인권 문제 등을 주제로 노래했다. 김민기, 정태춘, 노래를 찾는 사람들(김광석'안치환 등 소속) 등이 부른 민중가요는 캠퍼스 잔디밭이나 막걸리 집 등에서 퍼지며 대중가요보다 더 많은 인기를 얻기도 했다.
요즘 청소년들에겐 랩(rap) 음악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고민에 적극 공감해주고, 불안도 달래주는데다, 흥겨운 '쿵짝' 리듬이 스트레스도 해소해 준단다. 그러면서 직접 랩을 써서 내뱉으며 또래들과 소통하는 청소년들도 많아지고 있다.
◆랩은 적극적인 공감 도구
등수가 인생을 가르는 잣대/ 잘하고 못하고 둘 중 하나 넌 안 돼/
서울 바닥에 납품이 얼마나 올라가는지가 판단의 잣대/
12년간 부모님의 기대 아래 시험에 들지만/
졸업 후에 대부분이 느끼는 패배감이란/
('징역 12년' 중)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언더그라운드 힙합 뮤지션 '리플로'(Reflow)의 '징역 12년' 랩 가사 중 일부다. 제목에서 가리키는 12년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구성된 청소년 시기를 뜻한다.
이에 대해 '징역'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먼저 학교 성적으로 인생의 등급표가 매겨지는 우리 사회 '성적지상주의'를 꼬집는다. 취업과 성공을 위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사는 젊은이들이 서울로 향할 수밖에 없는 '서울지상주의'도 비판한다. 또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에 내던져졌을 때 젊은이들이 느끼는 불안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고교 3학년인 박모 군에게 이 곡을 들려줬더니 "몇 달 남지 않은 수능 시험일만 바라보고 공부하고 있다. 그런데 수능을 치고 난 이후에 대한 계획은 딱히 없다. 그래서 수능을 치고 학교를 나서면 마치 징역살이를 끝내고 나온 사람처럼 세상이 막막하고 두렵고 허무할 것 같다. 랩 가사가 마음속에 크게 와 닿는다"고 말했다.
국민학교에서 중학교로 들어가면 고등학교를 지나 우릴 포장센터로 넘겨.
넌 보기 좋은 널 만들기 위해 우릴 대학이란 포장지로 멋지게 싸 버리지.
('교실이데아' 중)
그런데 징역 12년의 주제는 1994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표한 '교실이데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대중가요 등이 가사를 통해 우리나라 교육 현실 등을 비판하며 청소년들로부터 큰 공감을 얻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하지만 차이점이 하나 있다. 교실이데아는 노래이고, 징역 12년은 랩이라는 것. 교실이데아는 듣거나 따라 부르며 공감할 수 있는 곡이다. 징역 12년은 듣거나 따라 부르며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듣는 이가 같은 주제로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랩으로 써서 내뱉으며 일종의 '지지 선언'도 할 수 있는 곡이다. 좀 더 깊숙하고 능동적인 공감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랩으로 소통하는 청소년들
"'우리 만나서 프리스타일(즉흥) 랩이나 할까?' 하며 연락을 돌리거나 인터넷 동호회 사이트에 공지를 올려 또래 청소년들을 모읍니다. 장소는 주로 대구 중구 국채보상공원이나 2'28기념중앙공원입니다. 많게는 10명 넘게도 모여요. 공원 한가운데 둥글게 모여 서서 돌아가며 즉흥적으로 랩을 해요. 이를 '사이퍼'(cypher)라고 합니다."
최근 청소년들 사이에 사이퍼가 유행하고 있다. 사이퍼는 또래들끼리 즉흥적으로 모여서 프리스타일 랩을 하는 일종의 '번개' 모임이다. 미국 힙합 문화에서 유래했다. 프리스타일 랩의 주제는 제한이 없다. 학교 수업이나 친구들 얘기부터 뉴스에서 본 시사 이슈까지 다양하다. 사이퍼는 즐거운 놀이이자 수다이며 열띤 토론이기도 한 셈이다.
대구에서도 '핫 스트리트'(Hot Street)라는 동호회가 사이퍼를 개최하고 있다. 인터넷 동호회 사이트에 가면 한 달 4, 5회꼴로 사이퍼 개최를 공지한 게시 글들을 확인할 수 있다. 수시로 이 모임에 참가하고 있다는 김윤형(19) 군은 "프리스타일 랩은 청소년들이 자신의 상황을 가장 시의적'직설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표현 양식이다. 사이퍼 모임을 통해 서로의 고민을 즉각 털어놓고 또 즉각 반응해주는 일종의 '랩 상담'을 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말했다.
길거리 공연을 통해 사람들에게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랩으로 발표하는 청소년들도 있다. '래퍼레이드'(rapperade'랩과 퍼레이드의 합성어)는 청소년 래퍼 등 아마추어 래퍼들에게 공연활동의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대구 시민들에게 이색적인 길거리 공연을 선물하는 취지로 열리고 있는 행사다. 올해 2월부터 시작된 이 행사는 짝수 달 둘째 토요일마다 동성로 등 시내 곳곳을 돌며 열리고 있다. 길거리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랩을 뽐내고 싶어 참가 신청을 하는 청소년 래퍼들이 많다.
◆화려한 래퍼의 꿈도
화려한 무대에서 청중을 호령하는 래퍼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면서 아마추어 래퍼를 넘어 힙합 뮤지션을 꿈꾸는 청소년들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한 케이블 방송에서 랩 오디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노래와 악기 연주로 뮤지션을 꿈꾸는 지망생이 많은 것에 비해 랩은 소수 마니아층만 즐길 뿐이라는 인식은 편견이었다. 1천여 명의 참가자가 오디션을 보기 위해 줄을 서 기다렸고, 이들 중 10대 청소년들이 제법 눈에 많이 띄었다.
한국방송예술교육진흥원은 아예 힙합학과를 만들었을 정도다. 음악 관련 학과가 국악, 실용음악 등으로 분야를 세분화한 경우는 있었지만 힙합 장르만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과를 개설한 것은 처음이다. 힙합학과 수업은 보컬, 랩, 디제잉(djing'턴테이블 위에 레코드판을 올려놓고 힙합 음악의 한 구성 요소로 조작하는 것), 작곡, 녹음, 공연 등 다양한 전문 과목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 지역에도 힙합 뮤지션을 꿈꾸는 청소년들이 나타나고 있고, 대구지역 독립문화단체인 '인디053'은 지망생들을 모집해 연습실, 녹음시설 등을 제공하고 있다.
뮤지션의 길을 꿈꿀 정도로 청소년들이 빠져드는 랩. 그 매력은 무엇일까?
유주상(19) 군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을 랩 가사 속에서는 스토리텔링으로 이뤄낼 수 있다"며 "소설을 쓰고, 만화를 그리는 것처럼 작가 스스로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또 "어릴 적부터 매우 소극적인 성격이었지만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랩을 하는 경험을 쌓으며 점점 자신감을 맛보고 있다"고 했다.
방석효(19'경북 안동 경일고 3학년) 군은 "길거리나 학교 축제 등에서 랩을 하는 것이 이젠 익숙한 취미가 됐다. 답답하고 지루한 학교생활의 활력소다. 나에게 랩은 일상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톡 쏘는 콜라'와 같다"고 말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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