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 그림은 넓고 크게

입력 2012-07-05 11:04:50

대구시 중구 동산동 229번지. 계산성당 맞은편에 있는 신명고등학교 동쪽으로 학교 담과 붙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조선 숙종 때인 1718년부터 구암서원(龜巖書院) 자리였다. 구암서원은 대원군 때 철폐됐다가 1924년 유림에서 다시 세웠으나 1996년 대구 북구 연암공원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구암서원 자리는 오랫동안 빈터처럼 됐다.

신명고 쪽 오르막으로 가면 쇠 난간 아래로 서원 전체가 다 보인다. 하지만 바깥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흔한 팻말도 하나 없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돌아가야 입구가 나온다. 손에 잡힐 듯 보이면서도 정작 찾아가기는 어려워 마치 도심 속 섬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일대는 대구의 제일 번화가인 동성로와 멀지 않다. 길을 기준으로 지역을 가르는 서구 개념으로는 두 블록 떨어져 있다. 유동 인구가 많은 반월당, 동아쇼핑, 현대백화점에서는 한 블록, 한국 관광의 별에 선정된 도심 골목길 투어의 노정과는 바로 맞닿는다. 그럼에도, 이곳은 도심과 가까운 남산동과 대봉동, 혹은 향촌동 일대의 뒷거리와 비슷하게 개발과는 거리가 멀었다. 좁은 골목길과 오밀조밀하게 맞닿은 옛 집들, 비싼 땅값 등 때문이다.

이곳을 주목하는 까닭은 도심 골목길 투어를 서문시장까지 연장하는 중요 길목이어서다. 물론 옆 길인 청라언덕을 넘어 선교 박물관과 선교사 사택이 있는 동산병원, 서문시장으로 가는 길이 있지만, 오히려 이곳을 거쳐 대신동 쪽으로 빠져 서문시장으로 이르는 것이 관광객의 구매력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하다. 또 이곳은 북구로 이전하기 전까지 구암서원이 중구의 유일한 서원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고, 대구의 대표 뒷골목인 진골목에 못지않은 골목길이 그대로 보존돼 있기도 하다.

옛 구암서원에서 북쪽인 국채보상로까지의 블록 넓이는 2만 4천여㎡다. 64채의 집이 있고, 그 중 반에 가까운 30채가 한옥이다. 어른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골목은 10m가 넘는 직선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이어져 있다. 자칫 막다른 길을 만나기 일쑤다. 이런 점에서 보존과 개발을 잘 조합하면 뭔가 괜찮은 작품이 하나 나올 만한 조건이 충분한 셈이다.

중구청은 2007년부터 동산동, 계산동, 종로, 진골목 일대에서 도심 재개발 사업을 벌였다. 1억 5천여만 원을 들인 구암서원의 개보수 작업도 이달 중 끝나 8월부터는 전통 한옥 숙박'체험 프로그램이 시작된다. 하지만 아직은 이것이 전부다. 재정이 빠듯한 기초지자체의 한계다.

이쪽은 골목길 개발을 병행해야 하는 곳이다. 바깥 도로에서 구암서원까지는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거치지 않으면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집 밖으로 노출된 재래식 화장실이나 많이 낡은 담벼락, 냄새가 나는 하수구 등 주거 환경을 손질해야 손님에게 한 번 놀러 오시라고 권할 수가 있다. 당장 접근성을 높이려면 신명고 쪽에서 서원 뒤편으로 계단을 내거나 색다르게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장기적으로는 이 일대 전체를 정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골목길 투어 참여 인원이 많이 늘었지만 둘러보고 지나치는 정도여서 경제적 효과로 연결되지 않는다"며 "구암서원의 한옥 체험 프로그램은 이익 창출 가능성을 찾아보는 하나의 시험"이라는 윤순영 중구청장의 판단은 옳다. 나아가 골목길 곳곳에 빈집이 꽤 있는 만큼 기념품 가게나 실비 식당 같은 것도 만들어야 한다. 대구시로서는 구암서원을 외부 손님을 맞는 한옥 게스트 하우스로 이용한다는 관점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서도 가능한 서구식 호텔보다는 골목길 투어+한옥 체험이라는 이색 상품은 대구의 이미지 재고에도 충분히 도움된다.

사실, 2007년부터 대구시와 중구청이 도심 곳곳을 들쑤셔 공사하고, 제일 복잡한 중앙로를 대중교통 전용지구화했을 때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5년 만에 이 일대는 크게 바뀌었다. 특히 도심 골목 투어는 3년 만인 지난해 방문객이 3만 명을 넘었다. 올해는 6월 말 현재 2만 7천여 명이 다녀갔고, 30% 수준이던 타 지역 방문객도 50%가 넘는다. 일단은 경쟁력이 있는 수치다.

좀 모자라는 현재진행형을 '대구 대표 문화 상품'이라는 미래완료형으로 바꾸려면 중구청과 대구시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 밑그림을 좀 더 크고, 넓게 그리고, 숨은 이야기를 찾아내 좀 화려하게 색칠하자. 걸어서 1시간 남짓한 거리에 몰려 있는 동성로~약령시~골목길~구암서원~서문시장 정도면 그냥 각각 따로 두기에는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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