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책쓰기는 분명 별거다

입력 2012-07-03 07:24:36

인연이 그런 것이란다. 억지로는 안 되어. 아무리 애가 타도 앞당겨 끄집어 올 수 없고, 아무리 서둘러서 다른 데로 가려 해도 달아날 수 없고잉. 지금 너한테로도 누가 먼 길 오고 있을 것이다. 와서는, 다리 아프다고 주저앉겄지. 물 한 모금 달라고.(최명희의 소설 '혼불' 중에서)

며칠 전 2012년 학생 저자 책 출판회를 어떻게 진행할까에 대해 책쓰기 지원단 선생님들과 회의를 했다. 이번에 새로 지원단에 들어온 한 선생님이 회의가 끝난 다음 말했다. "여기에 함께 하시는 선생님들 정말 이상해요. 이런 행사는 분명 교육청 행사일 수도 있는데 모두가 자신의 일처럼 생각해요. 저도 이런 성격의 모임에 자주 참가했는데 대부분 잠깐 모였다가 일이 끝나면 모임도 끝나요. 도와달라니까 그렇게 할 뿐, 자기 일은 아니라는 거죠."

아무리 지나치려 해도 스치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는 길이 있다. 반면에 아무리 스치려고 해도 시간과 공간이 결코 허락하지 않는 길도 있다. 책쓰기는 나에게 스치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는 많은 인연들을 만들어주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길을 함께 걸어준 많은 인연들을 나에게 선물했다.

언젠가 선생님이라는 길, 학교교육이라는 길이 비록 스스로 선택한 길이지만 도저히 희망이 되지 못한다고 절망한 적이 있었다. 사교육 시장이 던지는 유혹에 잠시 흔들리기도 했다. 물질적인 부분보다는 꿈꾸는 무엇인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점이 나를 유혹했다. 어쩌면 그 시간에 내가 그 길을 택했다면 나는 전혀 다른 나의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내가 걷는 길을 함께 걸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먼 길 걸어와 다리가 아프다고 주저앉았을 때, 물 한 모금이 필요했을 때, 내 다리를 주물러주고 물이 담긴 바가지를 내민 사람들이 여전히 지금도 곁에서 나와 함께 길을 걷고 있다. 신기한 건 8년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걷는 길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를 지니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걸어가는 길의 풍경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도 많았지만 궁극적인 방향에 대해서는 일치했다. 그 속에는 선생님도, 아이들도, 학부모도 있었다.

교육이 무엇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은 대부분 일치한다. 하지만 그것이 실행되는 현장 속에서의 과정과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특히 학교교육과 사교육이 지향하는 방향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인식과 방법이 비슷하다고 방향조차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결국 나는 학교교육에 남았고 지금은 그 학교교육의 정책을 기획하고 있다.

아이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는 턱없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아이들, 선생님, 학교를 위한 길을 걸어가려고 노력한다. 지금 존재하고 있는 영역에서 벗어난 공간에서 주어지는 것들이 현재 교육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내포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적절히 통제하면서 학교교육을 위한 정책을 실행해야 하는 것이 내 존재의 의미이다.

9일 대구광역시교육청 대회의실에서는 책쓰기 결과물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2012년 1차분으로 출판된 책은 18권. 2009년부터 출판을 시작한 아이들의 책은 벌써 48권이 되었다. 사실 더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수천 권의 출판되지 않은 책들이다.

누군가가 말한다. 책쓰기 정책은 이미 많이 써 먹지 않았느냐고. 답답하다. 아이들을 위한 정책은 써 먹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과 함께 영원하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게 별거냐고. 경쟁이 일반화되어 있는 지금 교육 현장에서 책쓰기 프로젝트는 경쟁으로 인한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지닌다. 그 질문은 자신만의 책을 쓴 아이들에게 해야 하고,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할 게다. "책쓰기는 분명 별거다"라고.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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