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판타지의 세계
미하엘 엔데의 '모모'는 나이가 꽤 들어서야 읽었다. 당시 '없는 이야기'를 비롯한 그의 여러 작품들이 국내에 활발하게 번역되던 무렵이었다.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은 '끝없는 이야기'의 끝없음에 매료되었고, 책을 다 읽고는 끝없는 이야기도 끝이 있다며 통쾌해했다. 유년을 훌쩍 지나 그의 책을 읽은 나는 작가의 끝없는 상상력이 도대체 어디에서 샘솟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미하엘 엔데가 말년에 발표한 '자유의 감옥'은 모두 8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자유의 감옥'은 '인샬라'라는 별명을 가진 장님 거지가 마호메트의 후계자인 칼리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간청하면서 시작된다. 쾌락을 좇으며 방탕한 생활을 하던 젊은이가 아주 커다랗고 둥근 돔형 건물 중앙의 둥근 침대에 누워 있다. 그 넓은 원형 공간을 구분하는 벽 어디에도 창은 없고 문만이 열을 지어 늘어서 있다. 그 문들은 모두 닫혀 있다. 아무 형체도 없는 음산한 음성만이 젊은이에게 어떤 문이든 골라 열어보라고 한다. 유일하게 차단되지 않은 문 하나를. 만약 하나를 열게 되면, 그 순간 모든 문들은 영원히 잠겨버린다. 어느 문을 선택할까 고민하는 가운데 문은 하나씩 사라지고 마침내 형체 없는 목소리마저 사라져버린다.
'긴 여행의 목표'는 누구에게나 다 있는 '집'을 태어나면서부터 갖지 못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이다. 도저히 그 끝에 이를 수 없는 통로에 대한 이야기인 '보로메오 콜미의 통로', 절대로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집에 대한 이야기인 '교외의 집'은 모두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교외의 집이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한 해석은 독자에 따라 다를 것이나, '독일 나치시대의 허상'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치에 저항했던 아버지 에드가 엔데에 대한 기억과 16살이 되던 2차 세계대전 마지막 해에 무기를 버리고 탈영했던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한 작품으로 해석된다.
'조금 작지만 괜찮아'는 식구들이 생활하는 방과 자신의 작업실, 심지어는 자신을 주차할 수 있는 차고까지 내부에 갖추고 다니는 아주 작은 자동차에 대한 이야기이다. '미스라임의 동굴'은 지하묘지 동굴세계에 사는 '그림자'들의 이야기인데, 묘지와 그림자를 연결한 발상이 기발한 이 작품에는 상징성과 함께 기존 사회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시사성이 담겨 있다.
희한한 목적을 가지고 정처 없이 꿈의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의 이야기인 '여행가 막스 무토의 비망록', 이 세상에서는 자신의 보금자리를 찾지 못하고 신비와 기적을 찾아 헤매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길잡이의 전설' 모두 독특하고 흥미로운 작품이다.
그러면 엔데가 말하는 판타지 세계는 우리의 현실 세계와 구체적으로 무슨 관계가 있을까? 엔데는 자신이 작품 속에서 묘사하는 판타지 세계는 단순히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과 평행한 또 하나의 현실'이라고 믿는다. 요컨대, 이 세상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말고도 수많은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대전제이다.
우리의 현실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은 그에게는 언제나 극복의 대상이다. 그는 '어째서 우리에겐 장차 있을 일에 대한 기억은 없는가?'라고 묻는다. 시간과 공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얽매여 사는 현대인들에게 시간적 여유와 공간적 여유를 찾아주고, 우리의 현실을 둘러싼 또 하나의 장벽인 상식과 인습의 허를 찌르는 판타지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사후 독일 언론들이 그를 가리켜 '독일문학의 마지막 낭만주의자'라 칭한 것도 이러한 맥락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구구단을 외울 때마다 자신의 환상이 망가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미하엘 엔데. 그가 죽었을 때 실린 한 신문기사처럼 그는 자신의 작품들과 함께 영원히 판타지 속에서 사는 건지도 모른다.
수성구립 용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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