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남일연(상)

입력 2012-06-07 14:02:55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불러 시대 아픔 다뤄

가수란 말 그대로 노래 부르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대중적 문화인을 가리키는데, 대개 뛰어난 가창의 재능을 지니고 일찍 꽃피우는 사례가 많습니다. 요즘은 음반 가수와 라이브 가수 등 활동공간이나 범위에 따라 가수 활동을 규정하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이러한 구분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가수의 기본은 음반을 취입하는 것이요, 그 음반의 소개와 선전을 위해 레코드사 전속 멤버가 되어서 미리 계획된 플랜대로 전국을 순회하는 악극단 공연에 참가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순회공연이 국내뿐 아니라 일본과 만주, 연해주 일대에까지 그 동선이 확장되었다고 하니 식민지의 열악했던 경제적 여건 속에서 악극단 멤버들의 삶의 고초는 이루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가수들은 대중들의 가슴을 파고들어 그들의 고단하고 지친 삶을 위로해주는 뛰어난 가요작품을 많이 발표했습니다.

당시 가수들의 생애를 두루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 10대 후반에 이미 전문적 경로로 접어든 사례를 흔히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가수는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운명적 경로의 작용에 의해 마치 한 송이의 꽃이 만발하듯 환하게 피어나 주변에 그윽한 향내와 고운 자태를 전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수에게 주어진 삶과 역할의 필연성이 아닐까 합니다. 가수 남일연(1919∼?)만 하더라도 우리의 귀와 눈에는 그다지 익숙한 이름이 아닐 터이나 그녀가 불렀던 대표곡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란 제목을 떠올리면 그저 가슴부터 꽉 메어오는 아픔과 쓰라림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그만큼 이 곡은 나라와 주권을 잃어버린 상실의 시대, 그 고통과 애련함을 절절하게 담아낸 실감으로 여전히 우리를 애달프게 합니다.

남일연의 경우도 불과 18세에 가수로 데뷔합니다. 그녀가 태어난 해는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으로 충남 논산이 고향입니다. 하지만 남일연의 학력과 가정환경,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밝혀진 자료가 전혀 없습니다. 아마도 시골에서 소학교 정도는 마쳤을 듯하고,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농촌을 순회하던 악극단 공연에 심취하여 넋을 놓고 뒤쫓아 다니던 철부지 소녀였을 듯합니다. 어떤 경로로 가요계와 구체적인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남일연은 1937년 가을 태평 레코드사에서 첫 음반을 발표하며 가요계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그 작품은 '눈물의 경부선'(박영호 작사, 이용준 작곡)과 '홍등은 탄식한다'(처녀림 작사, 남지춘 작곡) 등 2곡으로 같은 SP음반에 수록되었습니다. 두 작품의 작사, 작곡을 맡은 사람이 표면적으로 서로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일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서로 다른 사람인 것처럼 표시하는 까닭은 대중들로 하여금 작품의 신선한 느낌을 유지시키게 하려는 음반제작자의 계산 때문으로 보입니다. 당시 태평 레코드사에서 악사로 활동했던 한 노인은 가수 남일연의 성격과 용모를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말수도 적은 데다 몹시 착하고 순진한 성격, 항상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레코드사를 드나들던 모습이 너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남일연이 태평 레코드사를 통해 가수로 처음 데뷔하던 시절, 예명은 울금향(鬱金香)입니다. 그 회사의 문예부장으로 많은 가요시 작품을 발표하고 있었던 극작가 박영호가 이 예명을 붙여주었지요. 울금향은 튤립 꽃을 가리키는 중국식 한자말입니다. 남일연이 발표한 두 작품의 반응이 예상외로 좋아서 가수는 울금향이란 예명으로 태평 레코드사에서 '간데쪽쪽''거리의 정조''풍년일세''만경창파''이별의 바다로' 등 5곡을 더 발표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무렵 회사의 경영수지는 극도로 악화되어 거의 문을 닫기 직전이었던 탓으로 남일연은 박향림 등과 함께 콜럼비아 레코드사로 소속사를 옮겨갑니다.

영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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