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어나는 21세기 실크로드 <제2부>] 7. 위대한 미너렛-부하라의 랜드마크

입력 2012-05-30 07:43:23

낮에는 경배 대상 밤엔 등대 천년 동안 도시 흥망 지켜봐

위대한 탑이라는 의미의 칼란 미너렛은 오랫동안 부하라의 흥망을 지켜보며 무슬림들에게 주는 정신적 의미가 큰 구조물이다.
위대한 탑이라는 의미의 칼란 미너렛은 오랫동안 부하라의 흥망을 지켜보며 무슬림들에게 주는 정신적 의미가 큰 구조물이다.
둘레 약 800m의 아르크성은 반복되는 외침에 대항해 왔으나 몽골군에 이어 결국 소련군에게도 공략되었다.
둘레 약 800m의 아르크성은 반복되는 외침에 대항해 왔으나 몽골군에 이어 결국 소련군에게도 공략되었다.

푸른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이슬람의 종교적 구조물, 위대하다는 의미의 미너렛(첨탑)이다. 대표적인 것이 부하라에 있는 칼란 미너렛이다. 구운 벽돌을 약 46m 높이까지 쌓아올린 가장 높은 숭배의 대상이다. 도시의 어디에서든 보여 부하라의 랜드마크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1127년, 당시의 최고 권력자 칸에 의해 건립되어 부하라의 흥망을 지켜본 살아있는 증인으로 불린다. 탑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원통형이다. 탑신의 둘레를 14개 층으로 나누어 벽돌 쌓는 방식을 각각 다르게 하여 화려한 문양이 생기도록 했다. 꼭대기에 16개의 아치형 창문을 열고 밤에는 등불을 켜 등대 역할을 했다.

원래 미너렛은 금요일마다 기도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하지만 위에서 떨어트려 죽이는 사형대로도 사용되었다. 그래서 별명 '죽음의 탑'으로, 아래 바닥은 '피의 광장'으로 불리며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이었다. 부근에는 신학교도 있어 학생들에게 본보기로 실시했을 것이다. 1884년, 꼭대기에서 떨어트려진 한 남자의 바지가 낙하산 역할을 해서 살아났는데 그것을 계기로 14세기부터 계속되어온 그 잔혹한 형벌도 중단됐다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이 건조물은 모든 도시가 부서졌던 대지진도 이겨내며 오랜 세월 동안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고 우뚝 서 있다. 파괴의 화신 몽골군에 의한 참화도 당하지 않은 때문인지 전설들이 남아 있다.

첫 번째는 칭기즈칸이 쳐들어와 첨탑 앞에 섰을 때의 일화. 그가 탑을 올려다 보기 위해 고개를 젖히는 순간 바람이 불어 모자가 바닥에 떨어졌다. 엉겁결에 허리를 굽혀 주워들고서 말했다. "이 탑은 나의 고개를 숙이게 한 비범한 탑이다. 섣불리 부수면 안 될 것이다." 그래서 파괴를 면했다고 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18세기 초 담력이 센 한 학생이 튼튼한 갈고리를 만들어 그것을 이용해 암벽타기 하듯 정상까지 두 번이나 오르는데 성공했다. 부하라의 칸은 이 대담한 학생을 보고 아르크 성벽을 타고 올라 자신을 죽이지나 않을까 두려워졌다. 포상을 하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이 젊은이를 탑 위에서 떨어트리도록 명령했다. 주위 사람들이 극구 만류해 집행되지 않았으나 얼마 후 학생은 교수형을 당했다. 세 번째는 탑이 건립되기 전, 권력자 칸은 결투 끝에 종교지도자 이맘을 죽였다. 그날 밤 꿈에 이맘이 나타나 '나를 죽인 너는 나의 머리를 누구도 걸어 다니지 않는 곳에 묻어 달라'고 말했다. 그래서 칸은 그의 묘지 위에 이 칼란 미너렛을 세웠다고 한다.

만들어진 지 900년에 가까운 칼란 미너렛은 부하라 사람들만이 아니고 무슬림들에게 주는 정신적 의미가 크다. 칭기즈칸에 대한 이야기도 사실이든 만든 것이든 한 가닥 위로의 상징이 될 수는 있겠다. 참화를 겪으면서도 외침을 이겨낸 상징물로써 추앙과 저주를 동시에 받고 있는 역사적 건조물이다. 멀리 떨어진 나무그늘에서 한 노인이 두 손 모으고 신령스러운 첨탑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도 예사롭지 않다.

이 첨탑 바로 옆에 가교로 연결된 건물인 칼란 모스크를 둘러봤다. 1514년 건립됐는데 '칼란'은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1만 명의 신자가 동시에 참가할 수 있는 규모로 지금도 기도하는 장소로 사용된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정원을 중간에 두고 양쪽으로 긴 회랑이 있다. 여러 종교적 건물처럼 이 회랑도 수도자들의 명상하는 장소로 이용된다고 한다. 하얗게 칠해진 208개의 기둥이 아치형 천장을 받치고 있다. 끝부분까지 이어지는 대각선 구도의 이미지에 마음도 차분해지고 종교적인 경건함이 느껴진다.

부하라는 신시가지와 유적이 분포돼 있는 구시가지로 구별된다. 고대 부하라의 발상지 위에 세워진 아르크 고성은 구시가지의 대표적인 시설이다. 둘레 약 800m의 이 성곽은 반복되는 외침에 대항해 왔다. 13세기 몽골군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살육되고 성채는 파괴되었다가 18세기에 다시 복원됐다. 결국 1920년에는 소련군에게도 공략됐다. 지금은 관광자원으로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으나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역대 부하라 칸이 살았던 성이었다. 멸망 당시 칸이 소유하고 있던 수많은 금은보화를 어딘가에 숨겼는데 끝까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300명이 넘는 후궁이 있었고 성안에 있던 비밀궁전 할렘도 이제는 남아있지 않다. 성 밖의 광장은 사형장이었는데 잔인한 성격의 칸이 권력을 잡으면 이에 항거하는 사람은 잔혹한 방법으로 공개 처형됐다.

칭기즈칸은 일찍이 '성을 쌓으면 망하고 길을 열면 흥한다'고 말했다. 스스로 성을 쌓고 현실에 안주하면 철저히 부서지고 불확실하나 새로운 도전에 맞서면 판세를 바꿀 수 있다는 것. 1220년 그는 부하라를 점령한 후 무슬림들을 모아놓고 '코란'을 발로 차며 "나는 너희들의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이 보낸 사람"이라며 호언했다.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성벽을 올려다보면 까마득하게 높다. 그러나 안에서부터 부패한 조직은 아무리 성벽이 견고해도 공략된다는 것을 아르크성은 말해주고 있다.

글·사진:박순국(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sije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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