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살던고향은] (45) 공영구 대구문인협회장의 영천 청통

입력 2012-05-19 07:46:18

내 고장 5월은 봄의 절정…사과꽃 향기가 하얀 마을

청통면 계포리 볼통골, 말굽모양의 고향 뒷동산 대나무숲 오솔길을 걷는다. 소 먹이던 뒷동산은 아직도 그대로인데 동네앞 점빵집, 수십년 묵은 왕버드나무, 이발소, 도로변의 자갈에 맞아 상처난 미루나무는 다 어디로 갔을까. 김태형 기자
청통면 계포리 볼통골, 말굽모양의 고향 뒷동산 대나무숲 오솔길을 걷는다. 소 먹이던 뒷동산은 아직도 그대로인데 동네앞 점빵집, 수십년 묵은 왕버드나무, 이발소, 도로변의 자갈에 맞아 상처난 미루나무는 다 어디로 갔을까. 김태형 기자
청년시절 때까지 살았던 고향집. 고향을 떠나 온 뒤 마당은 마늘밭으로, 가옥은 마을 사람들의 창고로 변했다.
청년시절 때까지 살았던 고향집. 고향을 떠나 온 뒤 마당은 마늘밭으로, 가옥은 마을 사람들의 창고로 변했다.
볼통골 과수원 사과나무는 노령화로 사라지고 밤늦도록 책을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우던 원두막은 쓰러질 듯 고향을 지키고 있다.
볼통골 과수원 사과나무는 노령화로 사라지고 밤늦도록 책을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우던 원두막은 쓰러질 듯 고향을 지키고 있다.
공영구 대구 문인협회장
공영구 대구 문인협회장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청통면 면장님이 보낸 편지다. 오는 토요일 청통초등학교에서 면민 체육대회가 개최되니 참석해 달라는 초대장이었다. 마음은 벌써 고향으로 향한다.

고향은 나에게 참으로 안타깝고 애틋한 정으로 다가온다. 유년의 기억을 메고 쏘다니던 골목과 개구리처럼 뛰어다니던 청통천의 맑은 냇물은 항시 내 기억의 한 모롱이를 휘감고 돈다.

"옥아! 박꽃이 피었다/ 보리쌀 삶아서 저녁 지어야지/ 할머니의 가래 끓는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한/ 고즈넉한 황혼의 팔공산 자락"(졸시 '박꽃' 1연)의 내 고향 청통은 어딜 가나 늘 내 가슴에서 꽃 피는 그리운 계절로 다가오는 곳이다. 아버지의 사업 관계로 유년기에 잠시 고향을 떠난 적도 있지만 고향은 나를 정겹게 받아들여 키워 주었다. 고향의 안방에서는 어머니의 낭랑한 '춘향전'이 있고, 아버지의 구수한 '고문진보' 한시가 어려 있다. 노동의 일과를 마친 밤이면 우리 남매들은 부모님의 책 읽는 소리에 귀가 열리기도 하였다.

봄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이맘때쯤이면 내 고향 마을은 온통 사과꽃 향기로 하얗겠다. 강변이며 산비알이 온통 사과밭이었다. 꽃 대궐이 따로 없었다. 꽃을 찾는 벌들의 향연은 꿀맛보다 다디단 축제였다. 사과꽃 중에서도 홍옥꽃 향기를 나는 좋아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대구-포항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교통이 편리하고, 각종 레포츠타운 조성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각광 받는 시골로 변하고 있다. 청통'와촌 인터체인지에서 국도 919호선을 타고 10분이면 청통면 소재지에 닿게 되고, 거기서 신녕 방면으로 3분도 안 걸려, 호적초본을 떼면 늘 내 육신의 족적인 양 따라붙는 계포리 60번지에 닿게 된다.

잠시 청통(淸通)의 지리적인 특징을 더듬어 본다. 청통면은 영천시의 서북쪽, 팔공산의 동부 기슭에 위치한 산지이다. 팔공산 동부 골짜기를 흘러내린 두 가닥 신학천과 청통천의 맑은 물이 합류하여 면(面)의 중심을 관통한다 하여 '청통'이라 이름하였으리. 지명부터 맑고 신선하여 무공해의 청량한 느낌이 확 와 닿는 곳이다. 신학천이 면의 가슴을 가로질러 흐르고, 강 건너 달분지고개(월부령)를 넘으면 암각화로 유명한 보성, 신덕, 대평, 우천, 호당리가 있다.

달이 뜨는 고개라는 월부령이 있는가 하면 구름이 떠다닌다는 운부령이 있다. 운부령 자락에는 불도량 고시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공부하던 운부암이 있다. 청통면에는 유명 사찰이 많다. 은해사는 조계종 10교구 본사로 수미단을 모신 백흥암, 오백나한상을 모신 거조암, 청동보살좌상을 모신 운부암, 김유신이 무예를 연마했다는 중암암(속칭 돌구무절) 등 국보급 보물과 문화유산을 많이 보유한 사찰이다. 갓바위 부처를 모신 선본사도 은해사의 말사이다. 특히 거조암이 있는 신원골은 너무나 한적하고 아늑하여 오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한때 노태우 전 대통령도 여기에 들렀다가 팔공산의 맑은 물과 아름다운 가을 단풍에 취해 예정에도 없이 절에서 하루를 묵고 갔다는 일화가 있는 마을이다.

세인들은 지명인 청통면보다 은해사를 더 잘 알고 있다. 유명사찰이 많아서인지 청통면민들은 불심이 아주 두텁고 인정이 많으며 늘 부지런한 생활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 주위환경이 산골이라 비옥한 토질과 좋은 기후 조건은 아니지만 사과, 복숭아, 포도, 양파, 마늘 등 우수한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으며 은해사 맑은 계곡물을 이용한 미나리 재배가 소문 없이 확산되고 있는 곳이 청통면이다.

은해사에 대한 추억 한 편을 열어 본다. 북습(청통의 옛이름) 장터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불쑥 3㎞ 정도나 떨어진 은해사로 간다. 우람한 송림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놀이가 심드렁해지면 북쪽 폭포에 가서 목욕하고 돌아오곤 했다. 하루는 목욕하고 내려오다가 장난삼아 잘 익은 옥수수를 따 먹는데 그만 주인 할머니께 들켜 벌로 밭 두 고랑을 매어주고 감자 반 소쿠리씩 얻어 땀범벅이 된 채 해거름에야 산을 내려온 적이 있었다. 용케 감자를 얻어간 덕분에 혼나지는 않았다. 몇 년 전 등산가는 길에 그 밭 옆을 지나치다 보니 밭인지 산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묵혀져 있어서 마음이 아련했다.

내가 살던 계포리는 큰 마을인 볼통골과 작은 마을인 대재, 행정, 대포, 의성골로 이루어진 자연마을이다. 볼통골은 지형상 말굽 모양의 반원형을 이룬, 마을의 가운데가 밭인, 볼록 튀어나온 동네라 하여 '볼통골'이라 부른다. 작은 마을인 대재(大才))는 사촌(賜村:마을 이름을 성종 임금이 하사함)이다. 100년에 한 명씩 큰 재주꾼이 나타난다는 속설이 있는 대재는 이조참의(吏曹參議) 윤긍(尹兢), 낭산(郎山) 이후(李逅) 선생(북산서당을 통해 후학양성), 영남 3걸 중 한 사람인 이호대 선생, 서울대 역사학 교수를 하다 요절한 김성칠 교수를 배출한 마을이기도 하다.

지금은 집터만 남은 대재에서 볼통골로 가는 중간 지점에 한때 내가 살던 정미소가 있었다. '통통통' 종일 돌아가는 원동기 소리, 시끌벅적하던 인근 동네 사람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아침부터 와서 방아를 찧고는 종일 놀다 저녁 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여유로움이 서린 곳이다. 어머니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고명도 제대로 없는, 김치 몇 쪽과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린 간장에 벌건 밀가루로 만든 국수 한 그릇을 선뜻 내놓으시곤 했다.

정미소 일이 힘에 부친 아버지께서는 만년에 정미소를 처분한 후 볼통골 안골짝에 전답을 마련하여 과수원을 경영하셨다. 밭머리에 두어 평 원두막을 손수 지으셨는데 그 원두막도 지금은 세월에 겨워 쓰러질 듯 서 있다. 사과나무가 노령이어서 과수 농사도 시원찮아 파내고 포도로 바꾸더니 이제는 양파 재배를 한답시고 포도나무마저 다 파 버렸다. 용하게 옛 모습으로 남은 원두막은 나와 작은 형이 밤늦도록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은밀히 작가의 꿈을 키워오던 정든 장소이다. 원두막 위쪽 저수지의 마름 잎들은 예보다 더 푸르게 고향 땅을 지키고 있다. 비록 나는 고향을 떠나와도 오래도록 고향을 지키시다 돌아가신 누님 내외분이 원두막 맞은편 골짜기에 누워 계시니 그나마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동네 앞 점방이자 술집인 술이네 집은 어디 갔을까. 수십 년 묵은 왕버드 나무도, 이발소는 또 어디 갔을까. 오얏처럼 탱글탱글하던 진외 할머니의 목소리는 어디 있을까. 나를 업고 시내를 건너 주던 동네 큰머슴의 넓은 등이 그립다. 젖은 옷 벗겨 주던 동네 아지매의 따스한 손길은 또 어디서 느낄 수 있는가. 소 먹이러 늘 다니던 험산은 아직 그대로인데 어디서 공장 매연이 바람에 길게 머리를 풀고 있다. 산적들 소굴이 있었다던 늘미고개도 지금은 거의 평지에 가까워져 산적 운운은 말짱 거짓말이 되었다. 국도변의 자갈 맞아 상처 난 미루나무는 다 어디로 갔을까. 자지러지게 울던 말매미는 이제 다시 볼 수 없는가.

토요일에는 기쁜 마음으로 고향에 가 보아야겠다. '보쌀 소게 숭가 논 개랄'(보리쌀 속에 숨겨 둔 계란) 하나쯤 챙겨 줄 친구가 아직 남아 있기나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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