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벗은 나무 즐겨 그린 화가 박수근의 삶과 예술
가까운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이나 예술가의 평전을 즐겨 읽는 편이다. 길을 묻는 심정으로 앞서 간 이의 삶의 자취를 쫓을 때도 있지만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평전을 읽기도 한다.
우툴두툴한 바위와도 같은 질감의 잿빛에 헐벗은 나무와 아기를 업은 소녀를 즐겨 그린 화가 박수근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마침 지난해 늦가을 미술평론가 최열이 박수근 평전 '시대공감'을 출간한 터라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최열은 화가의 정서의 뿌리를 이루었을 고향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박수근이 나고 자란 강원도 양구는 '광채가 빛나고 아롱지는 땅, 신선이 사는 마을'로 순박하고 넉넉한 인심을 지녔던 곳이라고 한다. 양구에는 이름난 바위와 돌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고, 바위마다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었다. 어린 박수근은 그곳에서 숱한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고 정식으로 그림공부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쉬지 않고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던 박수근. 평론가 이경성은 박수근을 장욱진과 함께 '소박화가'라 불렀다. 소박화가란 자연발생의 순수, 천진무구한 본능을 발휘하여 원시미술의 소박하고 치졸한 양식을 특징으로 삼는 일군의 작가들을 말한다.
박수근은 1932년 생애 첫 작품 '봄이 오다'부터 줄곧 한국적인 소재와 주제로부터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는 조선 고유의 지방색 또는 풍토색을 그림에 담았으며 당대 한국의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찾았다. 나물 캐거나 빨래터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여성 또는 아이 업고 장보러 가는 아낙네가 현대 도시풍속으로부터 뒤떨어진 과거 농촌풍속이며 후진성의 상징이라고 해도 박수근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현대도시에서 찾아낸 소재라는 것도 기껏해야 가판대나 노점의 행상이었고 건물이라고는 판잣집뿐이었다.
박수근의 관심은 언제나 인간이었고 그 인간은 오직 평범한 사람들, 일상을 영위하는 서민이었다. 박수근의 작업세계를 통틀어 가장 비중 있는 소재 중 하나였던 벌거숭이 나목, 잎사귀 하나 없는 나목은 전쟁 이후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던 그 시대의 상징이었다. 폐허와도 같은 땅 위에 무성한 나무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고난의 길 위에서 인내력으로 풍성한 잎사귀들이 자라나기를 기다리는 사람, 다시 말해 앙상한 나목은 당대를 살아가는 민중의 모습이었다.
박수근이 도달한 이 시기 절정의 한국미는 '한국적 인간형, 한국적 자아, 한국미술의 핵심체, 한국미술의 주체성'을 실현한 것이었다. 고요함 속의 긴장, 박수근의 인물들은 움직임과 멈춤을 하나로 통일시킨 형상을 보여준다. 그의 화폭 속 인물들은 고요하지만, 그 속에는 늘 기다림의 긴장이 있다. 멈춤 속에 숨어 있는 움직임, 고난의 길에서 희망을 인내하는 사람. 그것은 바로 화가 박수근 자신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박수근이 도달한 고귀한 예술 형식은 독학의 길을 걸어온 화가, 배울 길 없어 미숙한 기술로 출발해 끝없이 연습을 되풀이함으로써 성취한 꾸밈없는 질박미 또는 아득한 고졸미였다.
박수근의 후원자였던 미국 여인 마리아 핸더슨은 박수근의 흑백조 계음을 조선시대 도자기인 백자의 색조와 비교하였다. 곱지만 깊이 가라앉아 고요하고 아늑한 박수근의 화폭에서 현대 서구 추상미술의 기법과 조선 고전미술의 기운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를 발견한 것이었다.
작가와의 젊은 시절 인연이 담겨 있어 화제가 된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 등장하는 박수근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마지못해 직장에 다니면서도, 헐벗은 나무 그림으로 온 집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그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슴에 품은 예술가로 그려져 있다. 박수근은 진실한 생활에서 고귀한 예술을 추구하는 것을 예술가의 이상으로 확신했다. 시대와 무관하게 오직 예술만을 꿈꾸었으나 당대를 살아간 민중들의 모습을 가장 절실하게 화폭에 담아내어 사후 가장 빛나는 작가가 된 박수근의 삶이 고요히 가슴을 적신다.
수성구립 용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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