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물레길] ⑭한훤당 김굉필의 도동서원

입력 2012-03-28 07:14:01

김종직 학맥 이은 실천궁행의 정신, 사약조차 초연히 받아

조선 선조때 한훤당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돼 그의 위패를 모시고 사액된 도동서원. 도동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 선조때 한훤당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돼 그의 위패를 모시고 사액된 도동서원. 도동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중정당 기단 전면 갑석 바로 아래에는 물고기와 여의주를 문 네 마리의 용이 머리만 내밀고 있는 조각이 튀어나와 있다. 이곳이 낙동강 수해가 잦았던 탓에 수재를 막기 위한 액막이용으로 만든 것이다.
중정당 기단 전면 갑석 바로 아래에는 물고기와 여의주를 문 네 마리의 용이 머리만 내밀고 있는 조각이 튀어나와 있다. 이곳이 낙동강 수해가 잦았던 탓에 수재를 막기 위한 액막이용으로 만든 것이다.
도동서원 토담은 우리 나라 최초로 보물로 지정됐다. 환주문을 중심으로 지대석 위에 자연 막돌을 쌓고 위에 암키와를 5단으로 줄 바르게 놓았다. 암키와 사이엔 진흙층을 쌓아올리고 1m 간격으로 수막새를 엇갈리게 끼워 넣었다.
도동서원 토담은 우리 나라 최초로 보물로 지정됐다. 환주문을 중심으로 지대석 위에 자연 막돌을 쌓고 위에 암키와를 5단으로 줄 바르게 놓았다. 암키와 사이엔 진흙층을 쌓아올리고 1m 간격으로 수막새를 엇갈리게 끼워 넣었다.

조선의 명현들은 높은 학덕으로 예치(禮治)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칼날 같은 직언을 올려 때로는 목숨을 잃는 불운을 자초하기도 했다. 명현들은 그런 죽음의 고통까지 오히려 명예로 여기고 아름답게 받아들였다. 자신의 사사로움을 버리는 대신 절개를 지키고 희생을 담보로 정의를 지킨 명현들은 하나같이 문묘에 배향돼 천 년의 삶을 누리고 있다.

현풍 솔례마을에서 낙동강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고갯길이 나온다. 다람재다. 느티골과 정수골을 사이한 산등성이가 마치 다람쥐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람재에 올라서면 도동서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한훤당 김굉필의 시비가 우두커니 서서 지나가는 길손들을 맞는다.

-한 늙은 소나무 푸른 수염 날리며, 길 먼지에 몸을 맡기고/ 수고하며 오고가는 길손 보내고 맞는다/ 날씨 차가워지는데 그대와 마음 같이 하는 이/ 지나는 사람들 중에 몇몇이나 보았느냐.

소학동자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한 도동서원.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고 해서 '도동'(道東)이라고 했다. 한훤당의 증조부인 김사곤이 수령과 청환을 역임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에 이주하면서 서흥 김씨가 현풍에 터를 잡게 된다.

한훤당은 호를 갖지 않았다. 처음에 '비를 만나도 겉은 젖지만 안은 젖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옹'(簑翁)이라 지었으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혼연한 처세의 길이 아니다"라며 취소했다. '寒暄堂'(한훤당)은 합천 야로현 처가 마을의 개천 건너 바위 아래 지은 서재의 당호였으나, 말년이 되자 사람들이 이를 호로 삼았다.

한훤당은 젊어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잣거리에서 불량한 사람들을 만나면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그를 보면 모두 피해 다녔다고 한다. 주로 현풍이나 처가가 있던 합천의 야로나 처외가인 성주의 가천지역을 오가며 사류(士類)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한훤당은 아침마다 어머니의 안부를 살펴 대청 아래에 엎드려 절하는 것을 거르지 않았다 한다.

혹시라도 어머니에게 불쾌한 기색이라도 있으면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서 감히 물러가지 못했다. 한훤당은 공경과 효도를 다한 후 어머니의 기쁜 표정을 보고서야 물러났던 것이다.

한훤당의 어머니 한씨 역시 성품이 엄하고 예법을 소중히 여겨 어린 자제들에 대한 훈도가 철저했다.

한훤당은 일찍이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소학'을 배웠다. 소학에 심취해 스스로를'소학동자'라 일컬을 정도였다. 이때부터 그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학문적 정통을 계승하게 된다.

한훤당은 스승 김종직의 가르침에 순종한다. 배운 바를 실행해 그의 아름다운 행실이 누구에게도 비할 데가 없었다. 사람들이 혹시 나랏일을 물으면 그는 "반드시 소학을 읽는 동자가 어찌 알리요"하며 겸손해했다. 한훤당의 겸양정신은 그가 남긴 시구에도 잘 나타나 있다.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해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 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

한훤당은 이후 평생토록 소학을 독신(篤信)하고 모든 처신을 소학의 가르침에 따라 '소학의 화신'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했고 특히 육경(六經)을 섭렵했다.

특히 한훤당은 스승 김종직의 문하에서 육경연구에 몰두해 성리학에 정진하면서 학문과 행실을 나누어 생각하지 아니하는 실천궁행의 정신으로 늘 주위의 귀감이 됐다. 스승의 학문이 시문을 위주로 한 데 반해 한훤당은 실천을 중요시한 것이다.

스승 김종직이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나랏일과 관련해 별로 건의한 적이 없다' 해서 시를 지어 바쳤는데 그 내용이 실로 칼날과 같다.

-道는 겨울에 가죽옷 입고/ 여름에 찬 것을 마시는 데 있으며/ 날이 개면 길 나서고 장마 때 머무는 것만/ 어찌 무조건 옳다고 여기리오/ 난초가 잡초에 묻히면/ 마침내는 변할 것이니/

그리되면 누가 소가 밭 갈고/ 말은 타는 것이란 것을 믿으리까.

제자로부터 따끔한 충고받은 스승 김종직이 대답한다.

-분수 밖의 벼슬이 대관에까지 이르렀으나/ 나랏일을 바로잡고 세상 구제함을 내가 어찌하리오/ 마침내 후배에게 옹졸하다고 조롱받겠지만/ 세리의 용렬함은 따를 수 없는 것이네.

이 일로 스승 김종직과의 관계가 다소 소원해지기도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한훤당은 자신의 잘잘못에 대해서는 철저히 시비를 가렸다.

어느 날 한훤당이 꿩 한 마리를 얻어서 말려두었다. 어머니에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마침 고양이가 꿩을 훔쳐먹었다. 이를 안 한훤당은 지나칠 정도로 종에게 꾸지람을 했다.

이를 지켜본 제자 조광조는 스승 한훤당에게 "봉양하는 정성이 비록 간절할지라도 군자의 말과 표현은 조심해야 할 줄로 압니다. 제가 마음 속에 의혹된 바가 있어서 감히 말씀드린다"며 정중하게 고했다.

한훤당은 이 같은 충고를 듣고는 몸을 일으켜 어린 제자 조광조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네 말을 들으니 내 잘못을 깨달았도다. 부끄럽구나! 네가 나의 스승이지, 내가 너의 스승이 아니다"라며 부끄러워했다.

정여창이 안음(함양) 현감으로 있을 때에 한훤당이 방문했다. 정여창이 금잔 하나를 만들어 한훤당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때 그는 정여창을 책망하면서 "자네가 이런 소용없는 일을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네. 후일에 반드시 이것으로써 남을 실수시킬 것" 이라며 사양하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처럼 한훤당은 정여창과 뜻이 같고 도를 합한다며 특별히 서로 가깝게 지냈다. 도의를 연마하고 고금의 일을 토론하며 때로는 밤을 새우기까지 했다.

어느 날 정여창이 한훤당에게 "장차 비방하는 논의가 일어날 것이니 제자를 모아 학문을 강론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권한다.

이에 한훤당은 "중(僧) 육행(陸行)이 불교를 가르칠 때 그 무리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어떤 사람이 육행에게 '가르침을 그만두라' 하자 육행은 '먼저 도를 깨달은 사람이 뒤늦은 사람을 깨우치는 법이니 내가 어찌 마음대로 간여하리오' 하였으니, 육행이 비록 스님이지만 그에게 분명 본받을 점이 있다"고 대답하자 정여창은 한훤당의 실천궁행에 머리를 숙였다고 한다.

한훤당은 25세 되던 해 초시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했다. 그해 6월 종로에 있는 원각사(탑골공원)의 부처가 돌아앉았다 해서 도성의 민심이 흉흉해진다. 조정에서는 인수대비까지 나서 불공을 드리며 소문의 진화를 위해 애썼다.

숭유억불. 유교를 하늘같이 숭상하는 조선에서 불교에 기대는 사례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조정의 대신들이 우왕좌왕할 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다. 이에 한훤당은 생원의 처지로 분연히 일어나 군왕과 조정의 처사를 일갈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모든 일은 급히 하면 변이 생기므로, 반드시 장차 금년에 절 약간을 헐고 명년에 절 약간을 헐어 점차로 제거하여, 수년으로 기한하여 그런 뒤에 다 혁파하여 없애리라. 눈을 비비며 우두커니 기다린 지 지금 10여 년이 되었으나 다만 중수하는 일만 듣고 혁제하는 명령은 듣지 못하였으니 신이 오히려 한스럽게 여겼습니다.

신은 통곡하며 흐르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가령 불상(佛像)이 돌아서고 걸어가기를 사람과 다름이 없이 하였다 하더라도, 국가에 무슨 보탬이 있으며 신민(臣民)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한갓 상서롭지 못한 한 괴물이 될 뿐입니다.

한원당은 '예기'에 따라 가범을 짓고, 의절을 마련해 자손들에게 가르치는 등 인륜을 중하게 여겼다. 아래로는 남녀 종들에게까지도 안팎의 직책을 분별해 집안일은 계집종, 바깥일은 사내종이 주관하게 했다. 또 능력을 헤아려 임무를 맡겼다. 봉급의 차이도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비교해 더 주기도 하고 덜 주기도 했다. 길사와 흉사의 경비도 그 해 농사의 풍작 여부에 따라 책정했다.

한훤당의 스승 김종직은 훗날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조의제문' 파동으로 물러날 때까지 자신의 문하들과 힘을 합쳐 성종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이때 한훤당은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결성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평안도 희천에 유배된다. 그로부터 2년 후 순천으로 다시 옮긴 후 5년간에 걸쳐 문도들에게 자신의 학문을 전수하던 중 '갑자사화'에 연루돼 사약을 받는다. 이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成宗妃)를 복위하려는 연산군과 이를 용인하지 않으려는 인수대비의 갈등이 빚어낸 참사를 말한다.

사약이 당도했다는 소식을 접한 한훤당은 목욕재계를 하고, 관대를 갖추면서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손으로 수염을 손질하여 입에 물면서"부모님에게 물려 받은 수염까지 상하게 할 수 없다"며 초연히 사약을 들이켜며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51세 때였다.

현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도동서원 뒷산에 한훤당과 부인 순천 박씨, 넷째아들, 셋째딸, 손자 등의 묘소가 조성돼 있다. 달성'김성우기자 swkim@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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