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앞 댓돌 위서 자던 아이 조선 불교 거목으로 우뚝
천왕문 앞 천 년 먹은 은행나무에 황룡이 똬리를 틀고 금방이라도 욱일승천할 기세다. "아! 꿈이었구나." 잠에서 깨어난 신묵대사는 평생 처음으로 참선 중 잠이 든 것이 내심 의아하면서도 꿈에 본 황룡이 너무나 생생해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꿈속에서 보았던 천왕문 앞 은행나무로 향했다. 1560년(명종 15년) 직지사 주지 신묵대사와 소년 사명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직지사 금강문과 천왕문 중간에는 널찍하고 평평한 돌 하나가 지금도 수백 년 된 벚나무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네모나게 다듬어진 듯한 돌은 반듯하게 수평으로 놓여 있다. 주변에 아무런 표식조차 없어 길손들이 무심히 지나치기 일쑤다. 하지만 이 돌은 임진왜란 때 도총섭(都摠攝)으로 승의군을 조직해 왜병을 무찌르고 종전 후에는 통신사로서 일본으로 건너가 3천500명의 조선 포로들을 구출해 돌아온 사명대사의 출가와 인연이 맺어져 있다.
◆직지사에서 출가한 사명당
사명대사(四溟大師'1544~1610)는 경남 밀양 태생으로 풍천 임씨(豊川任氏)다. 속명은 응규(應奎), 법명은 유정(惟政), 호는 사명당(四溟堂)이라고 했다. 13세 때에 대구도호부사를 역임한 조부 임종원에 의해 황악산에 은거하고 있던 유촌 황여헌(黃汝獻)에게 유학을 오게 된다. 황여헌은 세종 때의 명재상 황희(黃喜)의 현손(玄孫)으로 당시 석학으로 문명이 높았던 인물이다.
어린 사명당은 과거공부를 하다가 14세 때에 모친을 여의고 15세 때 부친마저 돌아가시자 공부에 뜻을 접고 방황을 거듭한다. 마침 직지사에 놀러왔다가 은행나무 그늘 아래 널찍한 돌을 발견하고 앉았다가 낮잠이 들었다. 공교롭게 같은 시간에 대웅전에서 참선을 하던 주지 신묵도 깜빡 잠이 든다. 신묵은 꿈속에 황룡이 나타나 천왕문 앞 은행나무를 감싸고 있는 꿈을 꾸고는 이상하게 여겨 그 자리로 가보니 한 아이가 돌 위에서 곤히 잠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양친을 잃고 괴로워하던 사명은 신묵에게 출가하기를 소원한다. 신묵은 이 아이가 자신이 꿈에서 본 황룡임을 직감하고 거두어 제자로 삼았다. 16세 되던 해인 1560년(명종 15년) 직지사에서 출가한 사명은 17세에 선과(禪科)에 장원으로 급제한다. 그러나 이듬해에 옛 스승인 황여헌의 딸이 직지사로 찾아와 만난 것을 다른 상좌승이 고자질해 산문출송(山門黜送'승적을 박탈당하고 절에서 쫓겨남)을 당하게 된다. 사명이 포행(布行) 수행 중 속세의 누나와 함께 온 여인들과 마주쳤으나 우연한 조우였다는 것이 봉은사 주지 보우(普雨)의 재판으로 밝혀져 허물없음으로 결론났다. 그는 경남 남해도 보리암에서 수행정진하다 1564년 20세에 직지사로 돌아온다. 사명당은 31세인 1572년 신묵의 뒤를 이어 마침내 직지사 주지가 된다. 사명당이 주지로 임명돼 지은 '귀향'(歸鄕)이라는 시(詩)는 당시 직지사의 사세와 자신이 출가했던 직지사에 대한 진솔한 소회가 잘 담겨 있다.
열다섯에 집을 나서 서른 되어 돌아오니(十五離家三十回)/ 긴 시냇물은 의구하게 서쪽에서 흘러오네(長天依舊水西來)/ 감나무다리 동쪽 언덕에 무성한 버들은(枾稿東岸千條柳)/ 절반이나 산승이 떠난 후에 심은 것이로다(强半山僧去後栽)
◆사명당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다
사명은 32세에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로 서산대사 휴정(休靜)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이때 선(禪)의 경지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
서산은 사명과의 만남을 청허당집(淸虛堂集)에서 '沙門(사문)의 一隻眼(일척안'도를 보는 또 다른 눈)/ 그 眼光(안광)이 八方(팔방)을 비추니/ 위엄은 왕이 칼을 잡은 듯하고/ 虛心(허심'맑고 비어서 모든 사물에 즉응(卽應)하나 결코 거기 물들지 않는 경계)은 거울이 臺(대)에 있는 듯하네'라고 말했다.
서산이 제자인 사명을 얼마나 높이 평가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사명은 43세에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菴)에서 하룻밤 소나기로 뜰에 떨어진 꽃을 보며 "부처가 내 안에 있는데 밖에서 구할 것인가" 하고는 열흘 동안 가부좌를 하고 앉아 지낸 것으로 전한다. 이때 또 한 번 대오(大悟)한 것으로 평가된다.
◆의병장으로 활약한 사명을 모신 직지사 사명각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승병을 조직해 승병장으로서 이름을 알렸다. 사명당은 임진왜란을 맞아 출병하며 우국충정의 심정을 이렇게 읊었다.
하늘은 이미 추워지고 흰 눈은 하염없이 내린다/ 붉은 머리 왜적의 옷이니 승병들이 종횡으로 달려간다/ 어육(魚肉)이 된 백성이 노상에 송장 되어 베개 하고 누웠네/ 슬프고 슬픔을 통곡함이여 날은 저물고 푸른 산은 무성하기만 하구나/요해(遼海)는 어디메요 임 계신 곳 바라보니 하늘 끝이 아득하다
사명은 스승인 서산대사를 도와 부총섭과 도총섭으로서 평양성 전투와 울산, 순천 전투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후인 1604년 통신사의 대표로서 일본을 방문, 포로 3천500명을 데리고 오기도 했다. 사명은 1607년 건강이 나빠져 치악산으로 들어갔으나 이듬해 선조가 붕어하자 배곡(拜哭)하고 해인사 홍제암으로 들어와 수행정진하다 1610년 8월 26일 입적했다.
직지사는 사명과의 인연으로 사명각(四溟閣)을 두고 있다. 대웅전 옆으로 난 단풍나무 군락을 따라가다 보면 사명각이 나온다. 사명대사의 영탱을 모신 곳으로 정조 11년(1787년) 세웠다. 사명각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사명각의 벽면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으로 건너가 여러 가지 이적을 보이며 왜인들을 감복시키고 백성들을 구출해 오는 과정을 담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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