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한의대 명예박사 학위 이상세씨…"약전골목을 약령시로 부활시킨 게 큰 보람"

입력 2012-03-05 09:43:20

"한약방 50년 인생 중 약전골목을 지금의 대구약령시로 부활시키는 데 앞장선 게 가장 큰 보람입니다."

대구 서구 내당동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는 이상세(70'신한한약방) 대표가 지난달 20일 대구한의대 학위수여식에서 대구약령시 부활과 불임여성의 출산을 도운 공로로 명예한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구약령시가 부활한 데는 이 대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1978년 초 30대 젊은 나이에 대구시한약협회 회장에 선출된 이 대표는 약령시 부활을 추진했고 그해 연말 대구시로부터 약령시 부활을 이끌어냈다. 현재의 약령시보존위원회도 대구약령시 부활로 탄생됐다. 이 대표의 진료실 벽에는 대구약령시 부활과 관련한 흑백사진 여러 장이 당시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다.

"약령시 부활을 추진하는 데 한의사, 약사들의 반대가 굉장히 심했어요. 더구나 약전골목 외곽의 한방 업자들도 약령시 부활이 변두리 한방업소를 죽이는 행위라며 반발했죠. 하지만 대구약령시가 부활된 지 3년이 지나자 잘했다는 평가가 나오데요."

이 대표는 당시 약령시 부활에 부정적 입장을 가진 대구시장과 관련 공무원들을 수십여 차례 만나 약전골목 발전을 위해 설득했고 결국 마음을 돌리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1980년대 초 대구약령시 한의약박물관과 도매시장이 들어서게 됐고 비포장 골목은 포장되고 어지럽게 매달린 한약봉지들은 가지런히 진열되는 등 약전골목의 현대화로 이어졌다.

이 대표는 지금의 대구약령시가 외국 관광객들의 관광코스로 된 것에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성에게 한약조제로 임신을 도와 출산의 기쁨을 안겨준 것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아요. 우리나라 저출산 문제 해결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는 1962년 한약방을 개설한 이래 한방처방으로 불임여성들의 출산을 돕는 데 평생을 바쳤다. 자신만의 약재와 처방을 개발해 임상실험을 거쳐 불임여성 2만8천500명의 출산을 도왔던 것.

불임여성 진료 차트만도 3만 장에 이르고 지금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전국에 불임여성 명의로 알려져 전성기 때는 불임여성이 하루에 60명 이상 몰려왔다고 전했다.

"당시 산부인과 의사 부인에서부터 판'검사 부인, 심지어 재벌가 며느리까지 저의 한약방을 찾았으니까요. 모두들 임신해 출산을 하고 나면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어요."

그는 대구한의대학교 발전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박물관 건립 때 소장 중이던 귀중한 한의학 서적, 고려청자, 토기 등 140여 점을 기증했다.

그는 1970년대 우리나라 새마을운동 일환으로 오동나무 보급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는 오동나무 씨 발아기술을 국내 첫 개발해 전국에 오동나무 묘목을 보급했던 것.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을 맺어 철로변에 심을 오동나무 5만 본도 기증했다.

그는 나눔의 미덕을 실천하는 데도 앞장섰다. 1973년에 서대구로타리클럽에 가입한 이래 40년 가까이 불우이웃돕기 봉사금만 8천만원 이상 내놨다. 1990년대 초 대구서구청 방위협의회 회장을 맡아 27개 동 예비군중대에 자전거 1대씩을 지원했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업을 돕기 위해 경북대, 영남대 등 지역 대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보태주기도 했다.

18세부터 성당에 다닌 그는 천주교 수녀원 건립, 성당 신축 등에 수십 차례 기금을 지원했고 천주교 대구대교구 사회복지재단에는 12년째 불우청소년 돕기 성금을 전달해오고 있다. 이 밖에도 어르신 경로잔치, 마을회관 건립, 백혈병 어린이 돕기 등에도 열정을 쏟았다.

'관찰'실천'인내'를 생활신조로 삼고 있는 그는 70대 나이에도 항상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여생을 불임여성 출산을 돕는 데 헌신하겠다는 그는 형편이 어려운 의대생이나 한의대생들을 위한 장학재단 설립도 계획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동석기자 dotory1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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