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논단] '희망의 언사'의 유효기간

입력 2012-02-27 09:09:30

30년 전쯤인 대학 2학년 무렵에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을 만났다. 이틀 만에 그 책을 읽고 나서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에서 빛을 만난 것처럼 흥분에 빠졌다. 내가 진리의 발견자라도 되는 것처럼 우쭐한 기분에 휩싸여 며칠을 보냈다.

책의 요지는 단순하다. 삶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소유(to have)의 삶, 다른 하나는 존재(to be)의 삶. 소유의 삶은 자본주의가 강제한 삶이며 아무리 많은 소유로도 만족할 줄 모르는 불행과 불안의 삶이다. 존재의 삶은 소유욕을 중단하고 존재 그 자체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인간 본연의 삶이다. 동서고금의 문헌들과 심리학 실험 결과들을 동원해 존재의 삶이 주는 행복감을 설파하는 프롬의 유려한 화술은 거의 황홀했다.

에리히 프롬이라는 위대한 멘토를 만나 이제 내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쯤 지속되었던 그 기쁨과 흥분의 상태는 한 여인으로부터 버림받았을 때 끝났다. 프롬은 실연의 열패감 앞에 침묵했다. 아니 그 열패감을 프롬의 방식으로 설명할 순 있어도 그 설명으로부터 어떤 위안도 얻지 못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실연의 자리에 취업 실패나 실직, 심각한 질병이나 불행한 사고가 놓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국의 오늘은 멘토들의 전성시대라 할만하다. 20세기 후반의 지식인들은 사회적 이상을 역설하고 그것을 위한 실천에 몰두했다. 그 자리를 대체한 오늘의 멘토들은 개인적 성공과 행복을 위한 언사에 매진한다. 그들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들의 강의는 종종 전파를 타고 우리의 안방에까지 도착한다.

그들에게서 나는 또 다른 에리히 프롬을 본다. 그들이 말하는 희망의 언사가 맡은 좋은 역할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수시로 아픈 우리는 진통제 없이 살아갈 수 없다. 학교 혹은 일터에서 겪은 좌절로 고통스러운 날에 누군가로부터 건네진 따뜻한 한마디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 해도, 평온한 밤을 선사하고 때로 위험한 자기파괴적 충동을 막을 수도 있다.

더욱이 교양과 인간적 덕목들을 처세의 수단으로 삼는 대부분의 성공학에는 동의할 수 없어도, 행복론의 복권(復權)에는 어떤 이의도 없다. 그중에서도 김정운 교수의 행복과 재미를 향한 찬미는 특별히 존중받을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위안 이후에 도래할 공허를 걱정한다. 희망의 언사는 태도를 바꾸면 행복할 수 있다고 설파한다. 하지만 태도라 불리는 사고'행위 양식은 나의 자율적 의지보다 체제의 은밀하지만 강력한 요구 혹은 유전자 혹은 무의식에 더 많이 속해 있다. 믿고 싶지 않지만 내 태도의 주인은 대개 타자이다.

우리는 그 많은 현인들의 교훈과 조언에도 불구하고 삶에는 행복과 재미의 시간보다 불안과 우울의 시간이 훨씬 더 길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희망의 언사는 종종 그 유효기간이 지난 뒤에 더 큰 우울을 초래한다.

우리는 자신의 감각을 일깨울 정말 좋은 것을 찾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해야 하지만, 그것이 행복을 약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행복에의 약속을 믿는 것보다, 우울과 불안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과 동반하는 방법을 찾는 편이 좋을 것이다.

기억할만한 두 가지 발언을 적어두고 싶다. 위대한 감독이자 잔혹하고 역겨운 표현으로 종종 비난받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악명 높았던 '크래시'(1996)를 이렇게 변호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위안이 되어줄 영화들을 이야기하는데, 이 영화가 그럴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절망감을 느끼거나 자살하고 싶을 때, 혹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느껴질 때 '미세스 다웃파이어' 같은 영화를 보고 싶진 않을 것이다. '크래시'나 '데드 링어' 혹은 '벌거벗은 점심' 같은 영화들이 위안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이 바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오히려 우리를 죽일 것이다."

2년 전 영면한 사상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인터뷰어가 그의 엄청난 저술 작업에 감탄하자 이렇게 답했다. "작업을 할 때면 난 불안한 순간들을 겪습니다. 하지만 작업하지 않을 때면 우울한 권태에 휩싸이고 내 의식은 나를 괴롭힙니다. 작업하는 삶이 다른 것들보다 나를 더 기쁘게 해주지는 않지만, 최소한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게는 해줍니다."

허문영/영화평론가·영화의전당 영화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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