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일본에서 배워야 할 것으로 가업승계문화를 꼽고 있다. 몇 대에서 수십 대에 걸친 료칸 주인, 스시 요리사, 도공 등이 수두룩하다. 남들이 볼 때 초라하고 힘든 일이라도 가업에 대한 자긍심은 대단한다. 많은 전문가들은 그 긍지가 일본 특유의 가업승계문화를 만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일본만 부러워할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도 어려운 여건에서도 가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장인정신을 솔∼솔∼ 풍기는 사람들. 그들을 찾아봤다.
#1. 시계수리명장 3부자(이희영-윤호'인호 씨)
대한민국에 여섯 명뿐인 시계수리 명장 중 한 명이 대구에 있다. 지방에서는 유일하다. 바로 40년 동안 시계 수리공 인생을 살고 있는 이희영(57) 씨다. 이 씨는 중학교 다닐 때 경북 의성군 다인면 면소재지에 있는 시계방에서 시계가 작동하는 원리를 우연히 알게 돼 이를 신기하고 재미있게 여겼다. 호기심은 그의 진로를 결정했다. 그는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시계수리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2001년에는 시계수리 분야에서 대한민국 명장에 올랐다. 의성에서 20년 동안 '정시당'을 운영했고, 이제는 대구 홈플러스 성서점에서 10년 넘게 시계수리 및 판매점을 하고 있다.
40년 외길 인생에 대한 보상은 컸다. 두 아들이 같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큰아들 윤호(36) 씨는 자신과 함께 홈플러스 성서점에서, 작은아들 인호(34) 씨는 홈플러스 구미점에서 시계점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장조카인 이근화 씨와 그의 동생 근성 씨, 5촌 조카(종질)인 이재우 씨 등 온 집안이 시계로 먹고살고 있다. 심지어는 며느리들도 시계점을 운영하고 있다. 이희영 씨 집안은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 모이면 시계 얘기로 밤을 샐 정도로 가업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고맙죠. 이 시계가 저는 물론 자식들과 조카들의 소질을 계발해줬고, 멋진 직업을 갖게 해 줬습니다. 일찍 시계 분야에 빠지는 바람에 다른 곳을 돌아볼 생각도 없고, 기회도 없었습니다. 열심히 살았고, 또 그 기술을 자녀와 조카들에게 전수해 준 것이 큰 보람입니다. 앞으로 대한민국 시계수리 명장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그 노하우를 집안에 이어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들 3부자의 시계수리 분야 수상 이력은 대단하다. 전국기능경기대회 시계수리 금메달은 밥 먹듯 따왔다. 또 정부기관 및 시'도의 각종 표창이나 지역봉사 등에서도 3부자가 동시에 활약하고 있다. 심지어는 시계수리 명장 3부자 모두 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으로도 활약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시계공이 많이 사라지고 있어 아쉽지만 아직도 시계를 좋아하고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계수리 명장 이희영의 집안은 시계를 평생의 업으로 삼을 것입니다. 제 인생은 시계와 공동운명체나 마찬가지입니다."
#2. 50년 이어온 사진사 부자(이홍로-용규 씨)
대구 중구 계산오거리에 위치한 홍도스튜디오에서 어렵지 않게 사진사 부자를 만날 수 있었다. 이 사진관은 1960년대 중반부터 중앙로와 계산오거리 인근에서 영업을 해왔다. 2대째 이어가고 있는 홍도스튜디오의 이홍로(74) 씨를 만났다.
"군 제대 이후 사진사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생각은 안 했지요. 이 일을 하면서 4남매 모두 대학에 진학시키고, 지금도 스튜디오를 아들이 물려받아 잘 운영하고 있으니 만족합니다. 3대째 이어가면 더 좋지요. 홍도스튜디오 반백 년이 아닌 백 년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들(용규 씨)이 빨리 결혼해 우리 집안에 차세대 사진사를 안겨줘야 할 텐데요."
이 씨는 아날로그 시대에 사진사가 되어 디지털 시대에 사진관을 경영하고 있지만 이젠 아들이 있어 든든하다. 아버지의 DNA를 그대로 이어받은 아들 용규(42) 씨는 고교-대학(영남대 철학과) 때 사진부 동아리 활동을 했으며, 대학 졸업 이후에는 전문 사진사가 되기 위해 계명문화대 사진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보다 전문적으로 사진 이론 및 실기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용규 씨는 "첨단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사진관 수입이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시대에 맞게끔 보다 나은 서비스로 고객들을 모시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사실 고교 때부터 아버지가 하던 일을 나의 천직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지금도 행복하게 사진사란 직업을 즐기고 있다"고 말했다.
부자뿐만이 아니다. 이홍로 씨의 부인 역시 이 사진관 경영에 동참해 사진사 집안을 일구는 데 큰힘을 보태고 있다.
#3. 3대째 대장장이 부자(이상철-준희 씨)
'처렁처렁' 쇳소리와 함께 53년을 살아온 고령의 대장장이 이상철(70) 씨. 벌겋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내리치는 불꽃 쇼로 평생을 살아온 용광로 같은 사나이다.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궈 담금질한 뒤, 각종 농기구를 만든다. 숙련된 대장장이의 솜씨로 빚어낸 농기구는 농군들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가 만든 농기구는 입소문을 타고 경북 각지에서 모여든 손님들에게 팔려나간다.
이 씨의 아버지는 대장장이였다. 이 씨는 15세 때부터 곁눈질을 통해 대장장이 일을 배웠다. "힘들었던 시절, 먹고 살기 위해 대장간 일을 배웠죠. 이제 일흔의 할아버지가 됐습니다. 잠시 외도(택시기사)를 한 적도 있지만, 먹고 살기 위해 쇠를 두드리고 또 두드리다 보니 반세기 넘는 기간동안 이 일을 하게 됐죠."
강인한 체력에 강인한 정신. 이 씨는 이렇게 한평생 쇠를 달구며 1남 3녀의 자식을 길러냈다. 한겨울에도 30℃를 훌쩍 넘는 열기 속에 보내왔다. 하지만 힘들지 않다. 이젠 든든한 아들이 있기 때문. 바로 3대째 대장장이 일을 이어주고 있는 준희(39) 씨다.
"아버지가 힘든 일을 저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운명인가 봅니다. 아버지가 저에겐 이 일을 시키지 않으려 어릴 때 곁에 오지도 못하게 했는데 역시 운명을 거부할 수 없나 봅니다."
아들 준희 씨는 가업을 잇기 위해 직장을 포기하고 10년째 아버지에게 대장간 기술을 배우고 있다. 그는 "쇠는 담금질 정도에 따라 강도가 달라진다"며 "쇠 모양을 만드는 망치질도 어렵지만 쇠의 강도를 내는 담금질은 고난도의 기술"이라고 말했다.
아들 준희 씨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1남 3녀를 두고 있는데, 이제 다섯 살 아들이 과연 가업을 4대째 이을지 궁금해진다.
#4. 금메달리스트, 아버지 인쇄사 경영수업
인쇄업계에도 대를 잇는 사례가 있다. 2006년 이탈리아 토리노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금메달리스트인 서호진(29) 씨가 아버지가 경영하는 동아종합인쇄사 영업부장으로 일하면서 가업 승계를 준비하고 있다. 아버지인 동아종합인쇄사 서만석(57) 대표는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아들이 대학팀 코치 등 쇼트트랙 지도자의 길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일인 이 인쇄업을 이어줘서 너무 고맙다"며 "인쇄업이 더 이상 사양산업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부자가 보여드리겠다"고 다짐했다.
아들 호진 씨는 공장에서 1년여 정도 부대끼고 이제는 2년 가까이 영업일을 배우고 있다. 가업을 잇는 만큼 포부만은 당당하다. 인쇄업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는 일념으로 아버지의 노하우를 하나하나 전수받고 있다.
호진 씨는 "운동에 대한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가업을 잇는 일이 제게는 더 소중하다"며 "인쇄업계의 1인자라는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땀 흘릴 것"이라고 말했다.
서 대표는 "첨단 디지털 시대에 맞는 인쇄공정으로 가격 경쟁력이나 품질면에서 우위를 점하겠다"며 "금메달리스트 아들이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는 만큼 전국 인쇄업의 선두주자로 우뚝 설 것"이라고 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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