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핸 4년 주기의 총선과 5년마다 치르는 대통령 선거가 있다. 20년에 한 번 맞는 큰 정치 행사다. 게다가 60년 만에 맞는 흑룡의 해니 뭐니 해서 들뜬 해에 있는 두 선거로 올해는 정치의 해라 할 수 있다. 보통의 해가 아닌 비상(非常)한 때이다. 그런데 이 비상한 시절을 이끄는 여야 정치 지도자는 공교롭게도 여성이다. 새누리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과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이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공동대표도 있다. 비상한 시절, 난파선 같은 위기의 당을 구하고 선거 승리를 위해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국가 미래가 걸려 있어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 전면 등장한 배경은 신라 최치원(崔致遠)의 말처럼 '비상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조선의 문집인 동문선(東文選)엔 '비상한 사람이 있어야(有非常之人) 비상한 일이 있고(然後有非常之事), 비상한 일이 있어야(有非常之事) 비상한 공이 있다(然後有非常之功)'는 최치원의 글이 실려 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비상한 공이 있으려면 비상한 일이 있어야 하고, 비상한 일이 있으면 이를 해결할 비상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당의 위기'란 '비상한 일'을 만나 '비상한 사람'으로 이들이 지휘봉을 쥔 것이라 해석하면 지나칠까.
하여튼 이들에게 이제 남은 과제는 '비상한 공'(非常之功)을 일궈내는 것이다. 비상한 공은 4월 총선과 12월 대선 승리일 것이다. 그 비상한 공을 통해 정치판을 새로 짜기 위해 이들이 시작한 작업이 바로 총선 공천 심사다. 이들이 후보 고르기에 공을 들이고 있는 이유이다. 이들이 총선에서 비상한 공을 일궈내면 12월 대선 출마로도 이어질 것이다. 첫 여성 대통령의 탄생 여부가 총선에 달린 셈이다. 첫 여성 대통령은 우리 역사를 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사실 우린 남성 지배 사회 속 오랜 여성 통치자 배출 역사를 갖고 있다. 첫 주인공은 632년 신라 제27대 왕이 된 선덕여왕이다. 일본 첫 여군주 스이코(推古)의 즉위 593년보다 늦지만 측천무후(則天武后)가 690년 첫 여제가 된 중국엔 반세기 이상 이르다. 물론 여왕은 즉위 전과 죽기 전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즉위 한 해 전엔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의 반란 기도가 있었다. 647년 여동생 진덕에게 왕 자리를 물려줄 땐 상대등 비담과 염종의 반란을 맞아 결국 와중에 목숨까지 잃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두 명의 여왕이 더 나왔다. 고구려 28왕, 백제 31왕, 고려 34왕, 조선 27왕 역사엔 없는 기록이다 .
여왕은 그러나 가혹한 평을 받았다. 신라 제47대 헌안왕은 "옛날에 선덕 진덕 두 여왕이 있었으나 이는 '새벽의 암탉'(牝鷄之晨)과 같아서 본받을 것이 못 된다"고 했다. 당 태종은 불과 40년 뒤 후궁 측천무후가 자신의 핏줄인 아들과 손자를 몰아내고 여제가 될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한 채 "여자를 임금으로 삼아 주위 나라들이 무시한다"고 신라를 깔보기도 했다.
또 고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사내는 높고 계집은 낮은데 어찌 할머니들이 안방을 나와서 국가의 정사를 결단하는 것을 용서하겠는가. 신라가 여자를 추대하여 왕위에 앉힌 것은 진실로 난세의 일이니 그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요행"이라 혹평했다. 조선의 동국통감은 "천지의 법을 어기고 음양의 이치를 거슬러 암탉이 새벽에 울어 집안이 망하는 화를 열어놓았으니 그 실수가 극심한 것"이라며 신라 패망을 세 여왕 탓으로 돌렸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선덕여왕과 관련, "곡식과 재물을 쓸데없는 곳에 다 써버리고, 그 신의 도움만을 바랐으니 슬프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폄하했다.
지금 이런 평가는 안 통한다. 오히려 선덕여왕을 본받고 배우려는 바람이 거세다. 여성 특유의 포용력과 소통, 인재 양성, 백성 사랑의 리더십을 발휘한 지도자이자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여왕으로 각인되고 있다. 이런 덕목은 오늘날 우리 정치 지도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이뤄지고 지구촌 곳곳에서 여성 정치 지도자들이 맹활약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새 정치판 짜기의 주인공으로 선덕여왕의 가치를 추구하는 우리 여성 정치인의 활약은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활동도 정열적이고 공천을 둘러싸고 견제와 반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눅 들지 않고 있다. '쭐리지'도 '쫄지'도 않는다. 근육질 마초 남성 정치인의 꼼수정치가 불러낸 이들이 이뤄낼 '비상한 공'이 궁금할 뿐이다.
鄭仁烈/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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