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상민 함께 공부한 선비마을…독립운동 아도서숙 복원 추진
반상의 법도를 무너뜨리고 개방 개혁에 앞장섰던 마을. 사회주의와 우익이 공존한 마을. 일제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펼친 마을. 바깥세상과 단절됐고, 농사지을 땅 한 뼘 없고, 샘이 없는 마을. 반경 30리 안의 토지를 소유했던 부자마을….
바로 육지 속의 섬 '전통 무섬마을'이다.
마을 앞 수도교와 뒤편 무섬교가 이 마을과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다. 40년 전만 해도 이 마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346년째 고가와 초가를 지어 오순도순 삶을 이어오고 있다. 이 마을이 세상 밖으로 나온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육지 속의 섬, 무섬마을
중앙고속도로 영주IC를 나와 영주시내 입구에서 문수면 와현리 방면으로 가다 보면 수도리 전통마을 푯말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이정표를 따라가면 흰 백사장을 병풍처럼 둘러싼 전통마을이 나타난다.
무섬마을은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사업비 151억3천300만원을 들여 고택 보수(39동), 한옥체험관(2동) 및 자료관(1동) 신축, 진입로 및 기반시설 정비사업을 펼쳐 말끔하게 정비해 놓았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선조들의 전통 생활상을 체험할 수도 있다. 옛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340여 년 전, 반남 박씨가 들어와 터를 잡았고 그 후 선성 김씨가 들어와 지금까지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해방 전만 해도 120여 가구가 넘는 부촌이었으나 현재는 40가구 4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평균나이는 70세가 넘는다.
고색창연한 고택 40여 채 가운데 30여 채가 조선 후기 사대부 가옥이다. 이 중 9채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반남 박씨 입향시조가 지은 만죽재, 선성 김씨 입향시조가 지은 해우당, 고종 때 병조참판을 지냈던 박재연 가옥 등이 줄지어 서 있다.
국내에 전통가옥은 많지만 여기처럼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주민들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이는 절묘한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태백산과 소백산 끝자락에 위치한 마을은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과 서천 등 두 개의 천(川)이 휘감아 돌아 외부로부터 고립돼왔기 때문이다.
풍수지리학적으로는 매화꽃이 가지에 매달린 '매화낙지', 또는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 형국을 한 길지 중 길지다. 조선시대의 난리와 한국전쟁, 천재지변 등을 거치면서도 그 원형을 잃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별리'(別離)라는 시로 아름다움을 노래한 곳이기도 하다.
▷만죽재(민속자료 제93호)
무섬마을의 입향시조인 박수(1641~1709) 선생이 1666년에 건립한 이 마을의 대표 가옥이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ㄷ자형 안채와 一 자형 사랑채가 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이다. 안채 평면구성은 대청 3칸을 중심으로 좌측에 상방 1칸, 고방 반칸, 문간 반칸이 연달아 놓여 있다. 문간은 안마당 쪽으로 벽체 없이 개방시키고, 서쪽에 널문을 달아 옆마당으로 통하게 했다. 대청 우측은 안방 칸반, 정지 칸반이 연이어 있고, 정지 위에는 안방에서 이용하는 다락이 설치되어 있다. 중문 왼쪽은 사랑채 부분으로 사랑방 2통칸, 마루방 1칸에 이어 마루방 뒤쪽에 못방 1칸을 두었다. 사랑채 앞쪽은 얕은 기단에 통주의 두리기둥을 세우고, 툇마루에 계자각 헌함을 돌렸다.
중문 오른쪽은 상부다락을 설치한 마구 1칸이 있다. 기단은 강돌에 시멘트, 모르타르로 상면을 마감하였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사랑채 앞면만 두리기둥이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사랑채 부분만 독립된 팔작지붕이고, 나머지는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얹었다.
▷해우당(민속자료 제92호)
선성(宣城) 김씨 입향조 김대(金臺)의 셋째 집 손자 영각(永珏'1809~1876)이 1836년에 건립했고 고종(高宗) 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낸 해우당(海愚堂) 김낙풍(1825~1900)이 1879년에 중수(重修)했다. 평탄한 대지에 배산하여 북서향한 정면 5칸 측면 6칸 규모로, 사랑채 오른쪽 1칸이 돌출된 편날개형이다. 평면구성은 대청 3칸을 중심으로 왼쪽에 상방 2통칸, 오른쪽에 안방 2통칸을 배치하고 안방 앞으로 정지 칸반, 고방 반칸을 연달아 배열했다.
상방 앞쪽으로는 상방정지 1칸, 중방 1칸, 고방 1칸으로 꾸몄다. 사랑채는 중문을 중심으로 왼쪽에 작은 사랑 1칸, 무루방 1칸을 두었고, 오른쪽에는 큰사랑방 2통칸에 연이어 마루방 1칸을 들였다. 마루방 뒤쪽에는 빈소방(못방) 1칸을 두었고 마루방과 빈소방은 ㅁ자형 평면에서 우측으로 1칸 돌출되어 있다. 큰 사랑채는 작은 사랑채보다 다소 지대를 높여 통주의 두리기둥을 세우고 툇마루에 계자각 헌함을 돌렸다.
특히 안채와 사랑채가 직선형으로 배치된 점이 특이하다. 지붕은 큰사랑채만 별도의 팔작지붕으로 꾸몄고, 나머지는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이 고택의 현판 글씨는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김덕진 가옥(민속자료 제117호)
평범해 보이지만 2002년도에 집을 수리하기 위해 땅을 파자 엽전이 1t 트럭으로 한 대 분량이나 나온 부잣집이다. 200여 년 전 반남 박씨가 건립한 집이다. ㅁ자형 정침과 오른쪽 ㄱ자형 방앗간채로 이뤄졌다. 정침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5칸의 납도리 집이다. 평면은 안마당 뒤쪽에 대청 2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칸반 안방을 두었고, 그 앞쪽으로 정지 1칸, 고방 1칸, 마구 1칸이 있다. 정지는 안마당 쪽으로 개방시키고, 부뚜막 위에 반침과 상부에 다락을 두어 안방에서 이용케 했다.
▷김뢰진 가옥(민속자료 제118호)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처가댁이다. 시인은 사랑하는 부인을 무섬마을에 두고 공부하러 떠나는 애틋한 마음을 '별리'(別離)라는 시로 노래했다. 특이하게도 시인은 남편을 떠나보내는 아내의 입장에서 시를 지었다.
이 가옥은 길쭉한 부정형 대지 위에 사랑채와 정침이 서로 축을 달리해 배치돼 있다. 정침은 약 200년 전에 건립된 까치구멍집이고, 사랑채는 정침만으로 방이 부족해 약 70~80년 전 건립되었다. 정침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6칸 까치구멍집이다.
◆독립운동의 본거지, 아도서숙
일제강점기인 1928년 10월 무섬마을 해우당 출신 대팽 김화진(金華鎭) 선생의 주도로 마을 청년들이 세운 공회당이자, 주민 교육기관이다.
최근 영주시는 아도서숙을 복원하기 위해 생존자들을 불러 고증절차를 거치고 있다. 1933년 7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숙될 때까지 주민들에게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 교육과 농업기술 교육을 실시했고,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활용하기도 했다.
취재진이 도착한 날 마침 아도서숙에서 공부를 한 생존자들이 모여 복원을 위한 고증절차를 밟고 있었다.
김운한(91'예비역 육군 준장) 씨는 "전통유교의 고장에서 남녀노소, 양반과 상민을 가리지 않고 교육을 시켜 개방과 개혁을 주도했다. 가장 먼저 반상의 법도를 무너뜨린 선비마을이었다"며 "아도서숙을 세운 대팽 선생과 그를 따랐던 청년들은 영주 신간회와 영주청년동맹을 이끌었고, 두 단체는 결국 이 마을에서 지하조직인 영주적색농조를 결성해 일제에 투쟁했다. 아도서숙이 영주지역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다"며 회고했다.
김 씨는 또 "당시 건물은 초등학교 교실 하나 정도 크기의 마루교실, 여기에 붙어 있는 두 개의 온돌방(교무실 등의 용도)이 있었다"며 "이곳에서는 오전, 오후, 야간반으로 나눠 교육을 했고, 한 반 학생 수는 15~20명 정도였다. 하지만 편한 시간에 반을 구분하지 않고 남녀노소 구분 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선성 김씨 대종손인 김광호(66) 씨는 "이 마을에서 항일운동으로 건국훈장을 추서받은 이는 김화진'김성규'김종진'김명진'김계진 등 5명이다. 앞으로 5명이 더 추서받을 것이다"면서 "선조들은 벼슬을 멀리했지만 학문을 중시했다. 반상의 법도를 포기하고 남녀노소, 양반'상민을 가리지 않고 교육했고 개방 개혁을 추진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세금을 안 내고 부역을 나가지 않았다. 좌우익이 공존할 만큼 사상이 자유로웠던 한국을 대표하는 선비 마을"이라고 했다.
영주'마경대기자 kdm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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