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행복편지] 만남 바이러스

입력 2012-02-21 07:46:24

지금 저는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에 와 있습니다. 죽장은 태백산의 등줄기입니다. 그런 까닭인 듯 입암리는 해발고도가 높거니와 가파른 협곡과 유속이 급한 개울이 있는 산골 마을입니다. 바위 틈새 혹은 굽은 솔밭 언저리의 하얀 잔설은 마치 백화가 피어난 듯 금방 향기를 뿜어낼 것만 같습니다. 얼어붙은 자호천 위로 칼바람이 지나갑니다. 천 년의 맑은 흐름을 지켜온 선바위(입암)와 입암서원 담벼락에도 여지없이 찬바람이 모여듭니다. 500여 년 전, 노계 박인로와 여헌 장현광은 천혜의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이곳에서 시문과 담론을 즐기고 시절을 달래곤 했지요.

'세상이 하도 수상하니 나를 본들 반길른가/ 이 내 몸 어디 기대어 올라 갈꼬/ 산 좋고 물 좋은 골짝에서 태어난 대로 살리라.'

절묘하게 생긴 선바위(입암) 아래로 맴돌다 돌아가는 물길 따라 시가를 띄워 보내던 노계의 얼굴이 어른거립니다. 하얀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그 옛날인 양 맑게 들립니다.

칠곡의 여헌은 퇴계학과 기호학을 두루 섭렵한 당대의 석학입니다.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었지요. 전란이 안겨준 시대적 상실감에 젖어 있던 그는 입암에 묻혀 살기로 했습니다.

그즈음 수군 장수로 임진왜란을 치르고 고향 영천으로 귀향한 중년의 노계는 사회적으로 기댈 데 없는 공허감과 무망한 자신을 추스르는 한편 자유롭고도 호기심에 찬 새로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지역적인 공간은 물론 나이와 신분적인 차이를 가리지 않고 좋은 친구들을 찾아 교유하였습니다.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낯선 지식인들을 자청하여 사귀고 그때그때 현장감 넘치는 작품을 남깁니다. 그 무렵 입암에서 여헌을 만나 미려한 자연을 노래하고 시정을 토로하는 벗이 된 게지요.

사람들이 서로 만나게 되기까지는 어떤 만남의 바이러스가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과 사람의 연결, 생각의 연결 그리고 나아가 자기반성과 창의성을 낳게 하는 그 만남 바이러스를 두고 우리는 인연이라고 말하지요. 관계의 점선을 촘촘하게 이어보면 참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노계가 막 수군을 떠났을 즈음 경상도체찰사로 부임한 한음 이덕형을 만납니다. 한음이 노계의 고향이자 자신의 선조 묘가 있는 영천에 들렀을 때입니다. 노계는 생면부지의 한음과 '조홍시가'를 앞에 놓고 단박에 사귐이 시작됩니다. 유쾌하게 싹틔운 두 사람의 우정은 노계가 늙도록 함께했지요.

'반중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그뿐 아닙니다. 사람에 대한 노계의 순수한 감정표현은 계속됩니다. 성주의 명유 한강 정구와는 동래와 울산 등지의 바닷가를 여행하면서 교분을 쌓습니다. 퇴계와 남명의 학문을 두루 아우른 한강은 임란 때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이 두 사람을 잇게 한 것은 노계의 고향 친구이자 임란 의병으로 이름을 날린 복재 정담이 있었던 까닭이기도 하거니와 한강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노계의 자유로운 시정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노계는 자신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만난 사람마다 아름답고도 절실한 가사와 시조로 관계의 끈을 묶어 놓곤 했습니다.

지난 그믐께, 나는 노계의 학덕을 기리고 있는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의 도계서원(道溪書院)을 다녀왔습니다. 서원 건너 산곡의 노계 묘소도 참배하였지요. 묘비는 여느 선비의 것과 조금 달라 보입니다. 화강암으로 작달막하고 동그스름하게 다듬어 세운, 마치 내가 상상하는 노계의 행장과 같습니다. 노계는 근엄하다거나 까칠남이 아니라 호기심에 가득 찬 동심과 웃음이 번져나는 훈남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 자기감정에 정직하다 못해 때때로 파안대소를 잊지 않는 호쾌한 사나이를 떠올리게 합니다. 전쟁을 경험한 충직한 군인인가 하면 섬세한 정서를 가진 문인으로서 균형 잡힌 인간상을 그려보게 합니다. 생각이 열리고 진취적인 그는 사람 간의 경계를 두지 않은 참 자유로운 삶을 살다간 분으로 상상됩니다. 그는 매우 호의적이고도 친화적인 만남의 바이러스를 가득 지닌 분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활짝 열린 사회에 살고 있다 할지라도 내 감정을 닫아두면 한 발 친교의 걸음도 내디딜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도계서원을 떠났습니다. 노계의 행적을 이해하고 그가 남긴 시가를 읊조리노라면 자꾸만 그가 좋아집니다. 제게도 이미 그의 만남 바이러스가 전이된 것일까요?

김정식/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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