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회와 소주 소박한 '간이식탁'…얼굴에는 행복 가득
1박 2일 남도여행 길에 오른다. 임진년 들어 첫 여행인 셈이다. 당일치기나 1박 2일 정도의 나들이는 자주 하는 편인데도 아직도 소풍 가는 아이처럼 잠을 설친다. 자정께 잠이 들었는데 새벽 4시쯤 눈이 떠지고 말았다.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아는 길 따라 남해 바닷가를 몇 왕복을 했는지 헤아릴 수가 없다.
해남 쪽에 잠잘 곳을 예약해 두었지만 가는 코스와 돌아오는 코스를 확정 짓지 못한 것이 께름칙했다.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순천에서 강진 쪽으로 달리다 마량어시장에서 생선회 장을 볼까, 아니면 완도어시장에 들렀다가 땅끝 쪽으로 내려갈까, 행여 눈이 많이 와 길이 미끄러우면 녹동항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올까, 계획의 갈피가 엇갈리자 근심 수준으로 치닫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점심은 갖고 가는 주먹 찰밥으로 때우고 생선회는 날씨를 봐가며 정하면 되겠지 하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다섯 도반들이 탄 차 안은 웃음이 넘쳐났다. 강원도 속초 일대를 다녀온 것이 불과 보름 전인데도 여행은 이렇게 즐거운 것이다. "여보세요, 마량어시장이지요, 감생이 큰 놈 있어요?" 돌아오는 대답은 신정 휴무가 3일까지여서 시장이 문을 열지 않았단다. 급하게 대책회의가 열렸다. 완도어시장을 들를까 하다가 고흥반도 맨 끝에 있는 녹동항에 들르기로 결론을 내렸다.
녹동어시장은 풍성했다. 옛날 모습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활어들의 질도 좋았고 종류도 다양했다. 활어공판장에 들어서니 활기찬 사람들의 호객하는 말투까지 정겹게 느껴졌다. "이거 있지라, 14만원만 줘, 이보다 더 큰 놈은 없어." 고무 다라이 바닥에 엎드려 있던 큰 감성돔이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후닥닥 몸부림을 친다.
입구에 진을 치고 있는 가게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어시장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살 것을 결정해야 후회를 하지 않는다. 자연산 광어'농어'도다리'우럭'가오리, 심지어 개상어'놀래기'게르치까지 없는 게 없다. 우리는 여관의 방값과 저녁과 아침, 두 끼 식사 비용을 어림짐작으로 셈해 보니 감성돔을 때려잡을 정도로 허세를 부릴 처지는 아니었다. 공판장 28호 현성수산(대표 정순자'010-5139-4710)에서 2,5㎏짜리 자연산 우럭 1마리를 6만원에, 도다리 8마리(4㎏)를 ㎏당 2만원씩 8만원에 샀다. 이 정도면 세 끼 식사에 곁들이는 생선회 안주로 훌륭할 것 같았다.
대구에서 가까운 포항, 감포, 강구 등 동해 주변의 어시장에 비하면 거의 반값 수준이었다. 생선을 회로 쳤더니 3개의 큰 쟁반에 가득했다. 우린 시장 입구 길거리 탁자에 점심상을 차렸다. 가게 주인이 주안상을 차리는 우리를 보고 해삼 한 접시와 세발 낙지 10마리를 덤으로 갖다 주었다. 그럭저럭 생선회에 소주 3병, 주먹밥 3덩이, 김치와 고추냉이간장이 전부였지만 시장 보러 오는 사람들이 소주 한잔씩을 마시는 간이 식탁이 오히려 비좁았다. 풋고추와 마늘도 없었지만 도반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지난해 겨울, 강원도 묵호어시장에서는 5만원짜리 우럭 1마리를 회로 쳐서 공동화장실 앞 잔디밭에 고기 상자 2개를 엎어 상을 차린 적이 있었다. 그때는 위스키 1병을 세 사람이 폭탄주로 마시느라 모두들 수준 높게 취했다. 술 한잔 거나하게 마시고 나니 "갈매기야 갈매기야 부산 갈매기야"란 노래 속에 들어 있던 갈매기가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더니 '고장 난 벽시계'까지 하늘에 걸리기도 했다. 옛날 어른들이 "술 만한 음식이 없다"는 말뜻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러나 오늘은 눈발이 흩날리는 새초롬한 날씨여서 하늘에서도 목에서도 갈매기는 날아오르지 않았다. 어시장을 드나드는 장꾼들이 '무엇을 그렇게 맛있게 먹나' 하고 들여다보았지만 우린 개의치 않았다. 오늘도 묵호에서처럼 위스키 폭탄주나 진득하게 마셨으면 도반들은 태진아의 '옥경이'를 불러내 송대관의 '네 박자'에 맞춰 '쿵짝 쿵짝'하고 새해 지신밟기를 했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이제 보성, 장흥, 강진을 거쳐 해남으로 달려가야 한다.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조금씩 조금씩 눈발을 뿌리고 있었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