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27>강용준 제주문인협회장의 제주 애월

입력 2012-01-07 07:05:26

바다, 나의 자장가 나의 놀이터 나의 푸른꿈

제주시에서 서쪽으로 20㎞ 떨어진 애월(涯月)은
제주시에서 서쪽으로 20㎞ 떨어진 애월(涯月)은 '물가에 달이 비치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깎아지른 절벽을 양쪽으로 둔 완만하면서도 아름다운 해안선을 가진 곳이다. 필자 앞으로 보이는 바다가 애월바다다.
해양문학의 백미 표해록기적비.
해양문학의 백미 표해록기적비.
강용준 희곡작가, 제주문인협회 회장
강용준 희곡작가, 제주문인협회 회장

수평선 너머로 환하게 집어등을 켠 고깃배들이 밤바다를 지키는 파수꾼처럼 일렬로 늘어서 점호를 받고 있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머리가 복잡해지면 차를 몰고 찾는 곳, 제주시에서 서쪽으로 20㎞ 떨어진 애월(涯月), 내가 태어난 곳이다.

'물가에 달이 비치는 마을'이란 시적인 이름을 가진 마을은 깎아지른 절벽을 양쪽으로 둔 완만하면서도 아름다운 해안선을 가진 곳이다. 축항(포구)이 있고 돈지(길쭉하게 바다를 향하여 나온 등대가 있는 곳)가 있어 고등학교 시절까지 고향에 가면 친구들과 모여 푸른 꿈을 설계하던 공간이다.

저녁에 고기잡이 나갔던 고깃배들이 철마다 자리, 한치, 갈치 등을 잡아 만선을 하고 뱃고동을 울리고 돌아오는 새벽이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포구로 달려갔다. 그물에 걸린 고기를 떼어내 주고 품삯으로 받아오는 고기들로 며칠간은 고기반찬을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다.

제주의 부녀자들은 물때가 되면 바다에서 물질을 했고, 낮에는 농사일을 한다. 제주 여성들의 강인함은 생존을 위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생활환경에서 축적된 것이다. 당연히 경제권도 여자의 몫이었고, 남자들은 배 타고 나가 고기를 잡거나 농사일을 하거나 집에서 애들을 챙겼다.

보통 해녀들은 바다를 갱이통, 누깨통, 할망 바당, 해녀 바당으로 나눈다. 갱이통은 게들이 사는 얕은 바다로 발목을 적실만한 물이 있는 곳으로, 어머니들이 물질하는 동안 어린애들이 노는 공간이다. 이렇게 물과 친해진 아이들은 누깨통이라는 어른 무릎 만한 웅덩이에서 헤엄을 배운다. 할망 바당은 먼 바다를 헤엄쳐 갈 수 없는 늙은 해녀들을 위한 비교적 가까운 바다를 말한다. 젊은 녀(潛女'해녀를 제주에서는 녀라 부른다)들은 어른들을 공경하여 이곳에서 물질을 하지 않고 먼 바다로 나갔다.

녀에도 급이 있다. 물질이 노련하여 채취한 수확물이 제일 많은 해녀를 상군, 보통이면 중군, 아직 미숙한 녀를 똥군이라 부른다. 나이 많고 경력이 오래됐다고 다 상군이 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상군 칭호를 듣는 것은 녀들에게 영광이다.

어렸을 적 할머니를 따라 바다에 갔던 기억이 새롭다. 할머니를 상군이라 하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는 것으로 봐서 물질은 신통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한 살 터울로 우리 형제들을 낳느라 그랬는지 어려서 어머니와 바다에 같이 간 기억은 없다. 할머니는 물때가 되면 손자들을 갯가로 데리고 가 애기구덕(요람)에 눕히고 물질을 했다.

어려서부터 물결소리와 숨비소리(바다 속에 들어갔다가 물 위로 떠오르고서 숨을 내뿜는 소리)를 자장가로 들으며 자랐다.

애월의 서쪽 끝에는 한담이라는 곳이 있는데 자그만 천연해수욕장이다. 어린 시절 이곳에서 헤엄을 익혔는데 물결이 저편으로 물러가면 바다 한가운데 모래밭이 하얗게 드러난다. 어린 시절 그곳엔 어른 손바닥만 한 대합이라는 큰 조개가 많았다.

모래밭에 서서 트위스트를 추듯 발 한쪽을 모래 속으로 집어넣다 보면 발바닥에 딱딱한 게 걸리는데 그게 대합이다. 큰 것은 집에 가져가 반찬으로 먹고 작은 것은 갯가로 나와 돌로 깨어 먹었다. 짭짤하면서도 쫄깃한 게 씹으면 씹을수록 감칠 맛이 났다.

남들보다 먼저 좋은 자리를 차지할 양으로 모래밭이 드러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헤엄쳐 그곳으로 건너갔다. 중학교 시절인가 동생과 그곳에 갔다. 동네 아이들이 헤엄을 쳐 바다를 건너자 초등학생인 동생이 자신 있다며 그들을 따라갔다. 그러나 당시 시내에 살던 동생이 어찌 맨날 바다에서 노는 그들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얼마 가지를 못해 뒤처져 허우적댔다.

물이 더 빠지기를 갯가에서 기다리던 나는 수영에 서투른 때라 섣불리 나서지를 못했는데, 동생이 물에 빠져 죽는다는 생각에 그냥 물에 뛰어들었다. 다행히 물의 깊이는 목을 넘지 않아서 수영 반 걷는 것 반으로 익사 일보 직전의 동생을 구했다. 동생은 그런 기억이 없다고 잡아떼지만 난 지금도 한담에 가면 그 장면이 선연히 떠오른다.

한담 바닷가를 해변 위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보면 그야말로 절경이다. 물결이 밀려와 모래밭을 덮은 부분은 에메랄드 빛이고 바위가 있는 부분은 거무스레하여 햇볕이 좋은 날은 하얀 물결과 검은 바위들과 어울려 장관이다. 바닷가에는 기암괴석들이 즐비하게 병풍처럼 둘러섰는데 그중에 잘 알려진 게 문필봉이다. 마치 붓을 세워놓은 것 같다 해서 불려진 이름인데 가린돌이라고도 한다.

그래서인지 애월에는 문인들이 많이 탄생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우리나라 해양문학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조선시대 '표해록'을 쓴 장한철이 이 마을 출신이고, 애월리 출신 문인들이 20여 명이나 된다.

부친은 백부가 4'3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피신하게 되자 백부가 운영하던 이발소를 맡아 운영했다. 아버지가 이발소를 성안(제주시내)으로 옮기면서 우리는 시내에서 자랐다. 어렸을 적 자랐던 동네 역시 바다에 이웃한 무근성(옛날 성터가 있던 동네)이었다. 무근성 앞은 탑바리(탑이 있던 바다)라고 하는데, 이 바다 가운데서 주민들의 음용수인 단물이 솟아올랐다. 만조 시에는 물터가 보이지 않지만 간조때가 되면 사방을 야트막한 돌담으로 에워싼 샘물터가 드러난다.

수도가 없던 시대에 제주사람들은 이렇게 바다 가운데서 솟아오르는 용천수를 떠다 먹었는데, 저녁때가 되면 물허벅을 지고 물 길으러 온 아가씨들, 부인네들로 가득 찼다.

물이 들었다가 밀려가면서 표면이 드러나는 곳을 갯그시(갯가)라 부르는데 특히 간만의 차가 큰 사리 때(그믐과 보름)는 물이 한참이나 밀려나가는데 이때를 기다려 사람들은 바릇(해산물)을 잡으려고 갯가로 몰려든다.

어떤 때는 사리가 밤중이 되기도 하는데, 어린 시절 아버지는 초저녁에 잠이 든 우리를 깨워서 온 식구가 바다로 가야 했다. 아버지가 만든 횃불을 따라 돌 틈을 뒤지노라면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물꾸럭(문어)이 돌 틈에서 꾸무럭거리며 불빛을 따라 기어 나오고, 커다란 돌을 젖히면 그 밑에 숨어 있던 깅이(게), 먹보말(큰 고둥), 구쟁기(소라), 오븐작이(전복의 일종), 구살(성게) 같은 해물들을 한 양동이 가득 잡았다.

지금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매립되어 단물이 나오던 용천수 터도 찾아볼 수 없고 시내 앞바다엔 갯그시도 사라졌다.

내 고향 애월도 세월의 변화에 많이 변했다. 우리가 놀던 바닷가는 양어장이 들어섰고, 포구는 콘크리트로 덮여 화물선과 여객선이 드나드는 항구와 요트 선착장으로 변했다.

다만 한담에는 별장과 민박시설이 들어서긴 했지만 그래도 옛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기에 알맞게 산책로도 뚫렸다. 종종 한담의 산책길을 걸으며 세월을 반추하곤 한다. 고향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없지만 무심한 물결은 언제나 내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내게 문학을 가르쳐 준 고향이다.

강용준 희곡작가, 제주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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