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지서 느끼는 쓸쓸한 감정…가슴 한구석 찌꺼기로 오래오래 남는다
절터에 절이 서있지 않으면 황량하고 쓸쓸하다. 정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잡초만 무성하다면 쉽게 돌아설 수 있다. 그러나 절은 화재와 전쟁의 포화 등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라지더라도 그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들은 불에 타지 않고 쉽게 삭지 않는 석탑이 주종을 이룬다.
절이 떠난 빈터를 폐사지(廢寺址)라 부른다. 그 사지라는 낱말 속에는 슬픔과 아픔이 묻어 있다. 심심한 날 홀로 폐사지에 가면 사랑했던 이를 떠나보낸 마지막 장소를 찾아간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사람이나 절이나 사라지고 나면 사무치게 그립고 아쉽고 절절한 법이다. 그건 쓸쓸한 낭만이며 회색빛 로망이다.
사랑이 떠나고 나면 마음에 문신이 새겨지지만 절이 없어진 자리에는 왜 석탑이 지표의 표석으로 남는가. 추억 속의 흔적들이 말끔하게 사라져야 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 그래야 상처에 새살이 돋듯 다음 행보를 예비할 수 있을 텐데 무엇이 모자라 이렇게 질기게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가. 폐사지에서 느끼는 쓸쓸한 감정은 가버린 연인에게서 느끼는 애매모호한 느낌처럼 가슴 한구석의 찌꺼기로 오래오래 남는다.
문화유산 답사를 다니면서 웬만한 폐사지는 두루 다녀 보았다. 부여 정림사지, 보령 성주사지, 산청 단속사지, 강릉 신복사지 등은 하나같이 석탑 아니면 하다못해 주춧돌 하나라도 흔적으로 남겨 두고 있었다. 그래서 빈 절터에서 느끼는 공허한 감정은 장소만 다를 뿐 거의 비슷했다.
여러 폐사지 중에서 좀처럼 잊히지 않는 곳이 하나 있다. 그곳은 내금강 속의 장안사 터이다. 내금강 코스를 가기 전에도 봄가을 두 차례나 외금강 코스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비석의 '산정무한'에 나오는 장안사 터를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마침 기회가 왔다. 온정각에서 버스로 2시간을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내금강 코스(장안사지~표훈사~보덕암~묘길상)와 삼일포와 해금강을 둘러보는 코스를 북한에서 어렵게 문을 연 것이다.
예정된 코스를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에 장안사 터 앞에 버스가 섰다. 예상대로 법당과 요사채 등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몽땅 날아가고 구석에 자그마한 삼층석탑이 빈 절터를 지키고 있었다. 절 마당에 깔린 찔레 가시덤불을 밟고 탑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니 화강암 피부에는 이끼가 피어 있었다. 문득 손끝으로 전해오는 석탑의 촉감에서 눈물로 번질 뻔한 외로움 같은 것이 내 가슴으로 전이되어 왔다.
갑자기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산정무한'의 글귀가 나도 모르게 읊조려졌다. 시험에 자주 나와 외울 수밖에 없었던 그 대목을 이렇게 장안사 터에서 되새길 줄이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공주의 섬섬옥수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胸裡)가 어떠했을까? 흥망이 재천이라. 천운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창맹(蒼氓)에게 베푸신 도타운 자혜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턴가!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角逐)하다가 한 움큼 부토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愁)롭다."
하버드대 종교철학자 폴 틸리히 교수는 외로움의 종류를 이렇게 구분 지은 적이 있다. "혼자 있는 즐거움은 솔리튜드(solitude)이며, 혼자 있는 고통은 론리니스(loneliness)다." 그러면 장안사 삼층석탑이 안고 있는 외로움은 고통일까 즐거움일까. 해답이 떠오르지 않아 '버스가 떠난다'는 호각소리가 들릴 때까지 탑 옆을 서성이고 있었다.
키 작은 꼬마처럼 생긴 석탑이 돌아서는 내 귀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어떤 아픔은 쾌락이고, 어떤 고통은 통증인 것쯤은 알지." 어라. 석탑이 선문답(禪問答)을 하네. 그때 갑자기 "사랑하는 이에게 순결을 바칠 때의 통증과 강간당할 때의 통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미국의 작가 멜러니 선스트럼이 '통증연대기'에서 한 말이 생각났다.
아하. 깨우침은 이렇게 한순간에 오는구나. 이끼 낀 석탑 큰스님에게서 한자락 깨달음을 얻고 나니 나눠주는 도시락을 먹지 않았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오! 론리니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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