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대부'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건강악화 별세

입력 2011-12-30 08:10:46

1983년부터 민청련 이끌며 남영동 전기·물고문 겪어…3선의원·보건부 장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30일 오전 눈을 감았다.

그는 민주화운동 시절 10여 년간 수배생활을 할 정도로 재야 운동권의 리더이자 한국 현대사에서 권위주의 체제에 저항한 대표적인 인물로 통했다.

그는 1965년 대학 입학 후부터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1967년 서울대 상대 학생회장 때 총'대선 부정선거 항의집회를 하다 제적당해 군대에 강제징집됐다. 1970년 복학했지만 이듬해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지명수배됐다. 이때부터 1979년 10'26 사태 때까지 도피생활을 했다.

김 고문은 1983년 첫 공개적 민주화운동 조직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해 1985년 투옥될 때까지 두 차례 의장을 맡았다. 그는 이때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보름 가까이 "스스로 죽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로 여덟 차례 전기고문과 두 차례 물고문을 받았다. 이 고문 후유증이 파킨슨병으로 이어졌고 사망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는 1987년 악몽 같은 고문 경험을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책으로 펴냈고, 미국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부인 인재근 씨와 공동 수상했다.

1994년 제도권 정치로 눈을 돌렸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잡고 본격적인 정당생활을 시작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도봉갑에 출마해 2004년 17대 총선까지 내리 3선 배지를 달았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불법 정치자금에 대한 양심고백을 하며 중도에 경선 중단을 선언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고 2004년 총선 때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한 이후 정동영 의원과 함께 열린우리당의 양대 계파 수장으로 자리매김했다.

2004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서 입각 경험을 쌓았고, 2006년 5'31 지방선거 참패 이후 "스스로 독배를 들겠다"며 당 의장을 맡아 당을 진두지휘했다.

2007년 열린우리당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경선에 나섰으나 범여권 대통합과 오픈 프라이머리(국민경선) 실현이라는 대의를 위해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2008년 18대 총선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원외에서 민주진보 대연합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진보정당과 시민사회 등 모든 세력이 참여하는 '반(反)보수 대연합'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 고문은 지난달 말 건강이 악화돼 끝내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한 측근은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민주진보 대연합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밝혔다"고 전했다.

유족은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공동 수상한 부인 인재근 씨와 1남 1녀(병준'병민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이동관기자 dkd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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