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26)변정환 대구한의대 명예 총장의 청도 이서

입력 2011-12-24 07:56:42

팔조령 100리 통학 끈기로 첫 환자 아버지 중풍 치료

팔조령 구길에서 지난날을 회상한다. 20세 만학도로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까지 걸어서 다니던 100리 길. 새벽 3시에 집을 나서야 했고, 집에 오면 밤 10시가 훌쩍 넘었다. 눈비를 맞으며 홀로 팔조령을 넘어다니던 그때의 담력과 끈기가 돌이켜보니 내 삶에 큰 자양분이 됐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팔조령 구길에서 지난날을 회상한다. 20세 만학도로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까지 걸어서 다니던 100리 길. 새벽 3시에 집을 나서야 했고, 집에 오면 밤 10시가 훌쩍 넘었다. 눈비를 맞으며 홀로 팔조령을 넘어다니던 그때의 담력과 끈기가 돌이켜보니 내 삶에 큰 자양분이 됐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청도군청 앞에 있는 군민헌장비. 헌장비 제정에 참여해 군민헌장을 직접 지었다.
청도군청 앞에 있는 군민헌장비. 헌장비 제정에 참여해 군민헌장을 직접 지었다.
청도군 이서면 고향집. 할아버지가 일제와 7년간 재판하면서 승소했지만 가산을 탕진해 아랫마을로 이사한 이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청도군 이서면 고향집. 할아버지가 일제와 7년간 재판하면서 승소했지만 가산을 탕진해 아랫마을로 이사한 이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변정환 대구한의대 명예총장
변정환 대구한의대 명예총장

대구에서 달성군 가창을 지나 팔조령 고개를 넘으면 청도군 이서면이다. 이 팔조령에 얽힌 사연도 많다. 임진왜란 때 왜병은 여기를 넘어왔고 일제는 경부선 개설 때 대구에서 팔조령을 넘어 청도를 갈 철도공사를 시도해 팔조령의 맥을 끊으려 했으나 8일간이나 핏물이 흘러나와 중단하고 남성현으로 변경했다고 하며,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나 도로공사 역시 7번의 설계가 실패로 끝나고 8번째 도로가 완성된 것이 또한 옛 팔조령 길이 되었다.

◆하루 두 번 힘던 고갯길

지금은 왕복 2차로인 쌍터널이 뚫렸으니 가는 길, 오는 길 씽씽 자동차가 넘나들어 고향 가는 길이 편해졌다. 내가 20세의 만학도로 대구시 남산동에 있는 영남고등학교까지는 집에서 100리 길이었다. 매일 새벽 3시에 나서야 했고, 학교가 끝나 집에 오면 밤 10시가 넘었다. 그때 팔조령 넘기가 하도 무서워 열차 통학권을 받아 대구역에서 남성현역까지 열차 통학을 했으나 남성현역에서 집에까지는 역시 산길 고개를 세 개나 넘어다녀야만 했다. 첫 번째 고개는 동행이 있어서 같이 왔지만 두 번째 고개부터는 나 혼자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혼자 재를 넘는다는 것은 웬만한 담력과 끈기가 없이는 힘든 일이었다. 달이 밝은 날은 덜했으나 그믐에는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고 산짐승이 후닥닥 놀라 달아나거나 잠자던 새가 놀라 날면 간이 콩알만해지면서 머리카락이 곧추섰다. 그렇지만 짐승보다는 사람을 만나면 정말 무서워 나무를 붙잡고 벌벌 떨었다.

흔히 산에 도적이 없기로는 선산(善山)이요,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주인이 아니면 집어가는 일이 없는 고장이 청도(淸道)라 했으니, 청도는 인심 또한 순후하고 노래와 연관된 음악의 고장으로 지명에 악기 이름을 딴 곳이 많다. 거문고 이름의 비슬산, 슬매산과 금촌, 가금마을 또한 쇠뿔 피리 이름의 풍각, 각남, 각북, 각계 그리고 북 이름의 고명동이 내가 난 고향이다. 북 고(鼓), 울 명(鳴)의 고명동을 일제가 고면(古眠)동으로 바꾸어 불렀으나 광복 후 흥선(興善)리가 되었다. 청도는 옛 이서고국(伊西古國)이었다. 북소리에 백성들의 신명을 돋우어 청도 깃발을 앞세워 온갖 악기 소리도 요란하게 울리며 한마음 한뜻이 되었던 고장이다.

◆일제와의 재판으로 가산 탕진

할아버지는 '변약국'으로 한의사였다. 마을 사람들은 '고산공 어르신'이라 했고, 없는데서는 '고추영감'이라 소곤거렸다.

일제는 '묘지관리법'이란 것을 만들어 마을마다 공동묘지를 두게 했다. 마침 그때 증조부가 돌아가셨는데 마을 뒤 선산에 묘를 썼다가 일본 경찰 주재소에서 할아버지를 끌고 가서는 "묘를 파 옮기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우리 선산에 내 아버지를 모셨는데 그게 무슨 죄가 되느냐?"고 따졌으나 결국 일제의 압력에 못 이겨 대구지방법원에 행정소송을 내어 일제와 기나긴 재판을 하게 되었다. 이미 사법권까지 손아귀에 쥔 일제는 매일같이 법원 출두명령서를 발부하여 할아버지를 괴롭혔으나 굽히지 않고 백 리 길 험한 팔조령을 넘어 대구법원까지 오가며 재판을 했다. 1심에서 패소하고 한국인 변호사를 내세워 고등법원에 항고했으나 또 패소했다. 그 사이 가산은 이미 파산이 되었으나 기어이 대법원까지 상고하여 승소했지만 7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고 사는 집까지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아랫마을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참으로 눈물겨운 승리였지만 집안은 더 어렵게 살아야만 했다.

◆할아버지는 나의 대스승

이때가 1932년, 내가 태어난 해다. 할아버지는 그동안 일제와의 재판으로 힘들었던 일을 잊고 손자에게 사랑을 쏟았던 것이다. 내가 두 살 때부터 할아버지 무릎에서 한문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사랑과 정성으로 6세 때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을 끝냈다. 할아버지는 내가 일곱 살이 되자 이서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할아버지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가야 한다. 호랑이는 바로 왜놈이다. 왜놈 공부도 배워야 이긴다"는 그 말씀은 평생 나의 뇌리에 박혀 있다. 내가 6학년이 된 어느 날 할아버지는 "불위양상(不爲良相)이면 영위양의(寧爲良醫)라. 어진 재상이 되지 않으려면 차라리 훌륭한 의사가 되어라. 내가 보기엔 넌 의사가 되어서 병들고 아픈 사람들을 구휼하는 것이 좋겠다"하셨다. 그 말씀이 할아버지의 마지막 가르침인 줄 미처 몰랐었다. 그해 6학년 여름방학을 맞이하는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니 할아버지가 운명하셨다. 어린아이는 시신을 보면 안 된다고 쫓아내는 바람에 사랑채 기둥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던 추억을 더듬는다. 내게 있어 대스승은 고산공 할아버지이시다.

◆남다른 고향의 추억

초등학교 시절 일제는 전쟁 막바지에 놋그릇 등 쇠붙이를 다 공출해 갔다. 학교에서도 날짜를 정해 가져가야 하는 날을 깜박 잊고 갔다가 집으로 쫓겨 오는데 학교 근처 길가 집에서 나를 보고 있던 여자아이가 "벌써 학교 끝났니?"하고 묻기에 놋그릇 이야길 했더니 자기 집에 들어갔다 나와 "이거라도 갖고 가서 공부해야지"라고 했다. 나는 너무 고마워 덥석 놋숟가락을 받아들고 뛰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했다. 그후 누나뻘 되는 여자아이를 찾아 고마운 표시도 못 하고 말았다. 틀림없이 그 누나는 복 받고 잘살 거야.

그해 여름, 나는 자칫했으면 물귀신이 될뻔 했다. 친구들 여럿이 금호못에 멱감으로 갔었던 것 같다. 수영이라고는 냇가에서 개헤엄만 하고 놀았던 내가 키 큰 이종복이 죽죽 물살을 헤치며 깊은 데로 나아가는 걸 신기하게 보고 따라 헤엄치다가 물속으로 빠졌다. 혼신의 힘을 다해 허우적거려도 나올 수 없었고 물을 먹고는 이제 죽는구나 할 때 축 늘어진 내 몸을 앞으로 쑥밀어 발이 땅에 닿아 살았다. 물을 토하고 막힌 숨을 몰아쉬게 하여 살아났다. 당시 나는 이종복에게 고맙다는 말도 못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객지생활 수년이 지난 후 찾아 고마움을 표하고 이젠 해마다 작은 정성이지만 보답하고 지낸다. 나를 구한 이종복은 고향 초등학교 동창생이고 은인이다.

◆면서기에서 감 장사 고학생

6'25전쟁이 일어나자 학도병으로 갔다가 의병제대를 하고 고향 집에 와 있을 때 이서면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그때만 해도 호적등초본을 일일이 한자로 써야 했는데 글자가 틀려 항의가 많아 한문공부를 한 나를 채용한 것이다. 그런데 호적계 서기로 있으니 친구들은 고등학교 진학을 다 하는데 나는 친구들 서류나 만들고 있어야 하나 생각하니 향학열에 견딜 수 없어 20세에 고등학생이 되었고 졸업 후 결혼할 비용을 가지고 서울 동양의대에 들어갔다. 집안이 가난하여 고학의 길을 각오하고 먼저 청도감 장사부터 시작했다. 그때도 청도 감은 서울에서도 인기가 좋아 잘 팔렸다. 또 동대문시장에서 헌책을 사서 청계천 가에서 팔기도 하면서 한의대를 졸업하고 한의사가 되어 고향 팔조령을 넘어 집에 오니 청천벽력도 유분수지,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져 누워 계시는 것이 아닌가. 나의 첫 환자가 아버지가 될 줄이야. 졸업과 국가고시 준비에 정신이 없는 나에게 가족이 알리지 않고 이곳 저곳 병원을 다니고 있었다. 집안 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중풍을 고치지 못한다면 나는 의사가 될 수 없다'는 굳은 각오로 한의대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정성을 다해 치료한 결과 놀랍게도 완쾌되었다. 내가 대구시내에 개업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후 아버지는 개업한 지 16년째인 75세에 돌아가셨다.

산이 푸르고 물이 맑으며 인심이 순박한 고향 사람들. 아름다운 풍속을 지켜온 고장. 화랑정신과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로 자긍심이 높은 고장 청도는 또한 자연의 정기를 받는 대자연 사랑 운동도 이어가야 할 것이다. 군민의 도리를 다하기 위한 군민헌장을 제정하는데 기여했다. 내가 살던 고향 청도여, 영원하여라!

변정환 대구한의대 명예총장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