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위에 냄비 올려두고 까맣게 잊어…40대 여성치매 7년 사이 2배 늘어
요즘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SBS 드라마 '천일의 약속'은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젊은 여자와 자신의 연인을 지키려는 젊은 남자의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극 중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서연의 나이는 불과 서른 살이다. 2004년 개봉된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도 치매에 걸린 젊은 아내와 끝까지 사랑을 지키려는 젊은 남편의 애절한 러브 스토리를 다뤄 눈물샘을 자극했다.
흔히 치매는 '고령화의 그늘'로 불린다. 치매가 주로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 나타나는 질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치매환자의 연령이 낮아지고 있다. 40, 50대뿐 아니라 20, 30대에 치매가 찾아와 고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천일의 약속'과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더 이상 드라마나 영화의 설정이 아니라 현실이 되고 있다.
◆젊어지는 치매 환자
올해 서른 살인 김모 씨. 그는 몇 달 전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업무를 정상적으로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기억력 장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군 복무까지 정상적으로 마친 김 씨에게 이상 증상이 나타난 것은 몇 년 전이다. 물건을 어디 두었는지 기억을 못 하고 친구와 약속을 해 놓고 까맣게 잊는 일이 잦아진 것. 단순 건망증으로 생각했던 김 씨는 증상이 점점 심해지자 올여름 병원을 찾았다 치매라는 믿기지 않는 진단을 받았다.
두 아이의 엄마인 박모(43) 씨도 최근 초기 치매 판정을 받았다. 박 씨는 가스레인지에 음식을 얹어 놓은 사실을 잊어 냄비를 태우거나 세탁기를 돌려 놓은 사실을 기억하지 못해 며칠 동안 빨래를 널지 않은 일을 자주 경험했다. 심지어 아이들과 함께 외출을 했다 혼자 귀가한 적도 있다. 박 씨는 증상이 심상치 않아 병원을 찾았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됐다.
뇌에 독성물질이 쌓여 기억력이 떨어지고 지적능력과 운동능력까지 상실해 결국 사망하게 되는 치매는 주로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젊은 치매 환자가 많아지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정책연구원이 건강보험 진료비 지급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치매질환 진료환자 수가 연평균 25%씩 증가했다. 치매에 따른 건강보험 진료비 역시 해마다 늘어나 2001년 344억원에서 2005년 872억원, 2008년 3천817억원으로 7년 사이 11배 이상 급증했다.
주목할 사항은 65세 미만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치매가 시작되는 초로기(初老期) 치매환자가 점점 늘고 있다는 점이다. 건강보험정책연구원 자료를 보면 40대 치매환자의 경우 2001년 563명에서 2008년 862명, 50대 치매환자는 2001년 1천901명에서 2008년 4천369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중년 여성의 치매 발병률이 빠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40대 여성 치매환자의 경우 2001년 261명에서 2008년에는 431명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반면 40대 남성 치매환자는 같은 기간 302명에서 431명으로 증가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작성한 '2003~2007 연령별 치매환자 및 진료비 현황' 자료에서도 중년 치매환자가 급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65세 미만 초로기 치매환자가 2003년 7천310명에서 2007년 1만1천256명으로 54%나 늘어났다. 초로기 치매환자 진료건수도 2003년 2만420건에서 2007년 3만2천672건으로 60% 증가했으며 진료비도 2003년 39억원에서 2007년 109억원으로 180% 급증했다. 대한치매학회는 전체 치매환자 가운데 65세 미만 환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20%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막막한 미래…죽음 같은 고통
초로기 치매는 노년기 치매보다 환자와 가족에게 더 많은 고통을 안겨 준다. 한창 활동할 나이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상실감이 환자를 엄습한다. 또 치매와의 싸움도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길다. 곁에서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 꼭 필요한 치매의 특성상 오랜 간병 과정에서 가족들이 겪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젊은 나이에 치매가 발병할 경우 직장을 잃는 동시에 치료 및 간병으로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에 경제적인 타격도 심하다.
서른 살에 치매 판정을 받은 김 씨는 아직도 자신이 치매환자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는 평범한 삶 자체도 꿈꿀 수 없게 된 자신의 미래가 막막하기만 하다. 김 씨 부모 역시 답답한 심정은 마찬가지다. 그의 부모는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다. 1, 2년도 아니고 수십 년 동안 병마와 싸워야 한다. 평생 아들 곁을 지킬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우리가 늙고 병들면 누가 아들을 돌보겠는가"라고 하소연했다.
전업주부인 박 씨도 치매 판정을 받은 뒤 아이들 걱정에 잠을 못 이루고 있다. "한창 손이 많이 가는 13살, 10살 난 두 딸을 언제까지 돌볼 수 있을지, 아이들 얼굴마저 기억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에 눈시울을 붉히는 경우가 많아졌다. 박 씨의 남편도 마음이 무겁다. 직장에 다니며 아내 간병과 아이들 뒷바라지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50대에 치매에 걸린 아내를 10년 넘게 돌보고 있는 이모(63) 씨. 그는 아내 병수발과 생활고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아내를 위해 일찌감치 직장을 그만두는 바람에 가정 형편이 어려워진 것. 이 씨는 "치매는 완치를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치료 기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무작정 환자를 돌봐야 하는 일은 죽음과 같은 고통이다. 살면서 나쁜 생각도 여러 번 했다"고 말했다.
◆개인적'사회적 관심 필요
초로기 치매환자는 늘고 있지만 개인적'사회적 인식은 저조하다. 환자뿐 아니라 가족들도 건망증으로 치부하거나 스트레스'음주 탓으로 여겨 치매를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일찍 찾아온 치매로 고생을 하고 있는 서모(46) 씨. 그는 걸음을 똑바로 걷거나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치매가 진행된 상태다. 멀쩡히 직장을 다니던 서 씨가 헛소리를 하는 등 이상 행동을 보인 것은 몇 년 전이다. 하지만 서 씨와 가족들은 평소 술을 많이 마신 탓에 나타난 현상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결국 치료 시기를 놓쳤다.
초로기 치매환자가 장기요양보험 급여를 받는 것도 쉽지 않다. 65세 미만자로 치매 등 노인성질환을 가진 사람이 장기요양급여를 받으려면 등급(1~3급) 판정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인지기능 장애만으로는 등급 판정을 받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인지기능뿐 아니라 행동장애까지 나타나야 등급 판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치매 환자에게 행동장애까지 나타나려면 이미 치매가 중기 이상으로 진행된 경우다. 이는 등급 판정을 받은 뒤 치료를 시작하면 이미 늦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구의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는 치매 전문의는 "치매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만큼 사회안전망을 확대하는 차원에서 등급 판정 기준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대한치매학회 이사장인 한설희 건국대 교수는 "초로기 치매환자의 경우 10~20년 동안 장기 관리해야 하는 만큼 한정된 복지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도출돼야 한다"고 밝혔다.
◆조기 발견이 중요
대한치매학회는 초로기 치매환자가 늘고 있는 것은 스트레스 등의 환경적 요인과 유전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고 있다. 또 대한치매학회는 치매는 사실상 완치가 불가능한 병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조기 발견과 조기 치료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치매 위험인자를 조기 발견해 이를 차단하면 발병 위험을 낮출 수 있고 발병된 경우라도 진행 속도를 완화시킬 수 있다는 것. 윤성환 대구시시지노인전문병원 진료부장은 "초로기 치매환자를 분석해 보면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에 치매가 시작되는 환자 수가 눈에 띄게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치매를 완치시킬 수 있는 치료제는 개발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치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환경적 요인 등을 제거해 치매를 예방하고 진행 속도를 늦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치매가 의심되면 빨리 진단을 받아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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