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틋함의 로마/복거일 지음/문학과 지성사 펴냄
'사랑스러운 이와 함께 건넌/ 그 흐린 시간의 강물/ 지금은 어디쯤 흐르나/ 우리가 안은 운명의 발길이야/ 가볍게 만나고/ 더 가볍게 갈라지지만/ 아, 이제 우리는 아네/ 모든 사랑의 발길은/ 애틋함의 로마로 통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기억하라/ 젊은 날의 풋풋한 사랑을/ 어쩌다 찾은 철 지난 사랑을.'
복거일의 소설집 '애틋함의 로마'에서 주인공 마이크가 어둑한 카페에서 부르는 노래다. 서기 2832년이 배경이며, 주인공 마이크는 죽기로 되어 있던 전투, 그러니까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 마지막 한 사람까지 버티면서 오직 시간을 끌기 위한 전투에 투입된다. 전투에 참가하기 전에 용병들은 자신의 육신을 스캔으로 남겼다. 육신이 죽더라도 그 스캔 자료를 바탕으로 원래 그와 꼭 같은 육신과 꼭 같은 기억을 가진 존재를 복원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복제된 인간은 복제 당시까지는 같지만, 이후의 삶은 다른 체험과 지식으로 섞이기 때문에 원본과 달라진다.)
마이크가 죽은 것으로 판단한 정부는 스캔을 바탕으로 그를 복원해 '마이키'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진짜 마이크는 그 전투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우연히 마이크와 마이키는 만나고, 묘한 느낌, 다소간의 즐거움마저 느낀다.
마이크와 마이키는 하나의 원형질을 갖고 있지만, 각자의 인생을 산다. 복제로 태어난 뒤의 경험과 기억이 다르기 때문에 두 사람은 다른 인간이다. 그럼에도 외모는 똑같고 기질도 흡사하다.
복제인간 마이키가 사랑하는 여인은, 원본인 마이크가 사랑했던 여인과 외모와 기질에서 꼭 닮았다. 그리고 마이크와 마이키 모두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진다는 점도 닮았다. 복제인간 마이키는 연인과 헤어지고 그 슬픔을 달래기 위해 원본이 그랬듯, 용병으로 전쟁에 참가한다. 차이가 있다면 원본과 달리 복제인간 마이키는 죽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분신인 마이키가 연인인 소니아와 헤어지고, 전투에 참가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이크는 이렇게 독백한다.
'슬프게도 우리(나와 마이키)에게는 우리의, 그녀(소니아와 그녀의 분신)에게는 그녀의 길이 따로 있었다. 우리는 나름으로 애썼다. 다른 분지를 향해 흐르는 물길을 돌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물길을 돌리지 못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운명을 돌이킬 길은 없었다. 우리가 애써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운명이 따로 있다'는 사실뿐이다. 애쓰지 않았다면 그것이 운명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저항할 수 없는 운명 앞에, 도리 없는 운명 앞에서 마이크는 노래한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젊은 날의 풋풋한 사랑을/ 어쩌다 찾은 철 지난 사랑을….'
운명의 물길을 돌릴 수 없고, 거스를 수도 없으니, 우리는 쓴 미소 지으며 지난날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운명은 우리의 저항을 용납하지 않지만, 우리가 '지난날의 사랑'을 기억하며 미소 짓는 것마저 금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날카로운 운명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쓴 미소를 지으며 기억하는 일뿐이다.
조두진기자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