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석재 서병오 기념사업 시급하다

입력 2011-10-05 07:50:07

석재 서병오 기념사업 시급하다

사단법인 비움서예포럼은 '2009 국제 서예의 동향전' 이후 세 번째로 '석재 서병오 서화전' 및 '2011 국제 서예의 동향전'을 지난달 6일부터 18일까지 13일간 대구 문화예술회관에서 열었다. 시민, 문화예술, 서화인의 관심 속에 1만여 명이 전시장을 다녀갔다.

'석재 서병오 서화전'에는 석재 서병오 선생의 작품 50여 점과 그의 선생이었던 팔하 서석지, 그리고 석재와 같이 학문을 한 회산 박기돈, 석강 곽석규 등과 제자 긍석 김진만, 죽농 서동균, 운강 배효원, 우송 신대식, 무위당 이원세 등 12명의 작품도 함께 전시했다. 석재 서병오의 작품세계와 그 당대의 흐름을 종합해 볼 수 있는 입체적인 규명을 시도한 전시였다. 영남 문묵의 종주인 석재 서병오의 예술세계를 기리고 예술성을 널리 알려서 지역성을 넘어선 석재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기념행사를 가지는 데 의미가 있다.

석재(石齋) 서병오(1862~1936)는 대구가 낳은 근대 문묵의 종주이고 당대 국제적으로 최상 수준의 시'서'화 삼절(三絶) 서화가(書畵家)다. 흥선대원군은 어릴 때 그의 기재를 알아보고 총애했고, 우리나라에서 필적할 예술적 경지를 찾을 수 없었음은 물론 예술세계의 발자취에 대한 국제적 명성도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석재의 삶과 작품은 우리의 아쉬움을 더한다.

회산 박기돈은 석재 서병오의 지우이면서 독립운동가로 국채보상운동, 대구상공회의소의 전신인 대구상업회의소 초대회장(1916)을 역임한 지역 기업인이고 서예가였다. 제자인 긍석 김진만의 작품에는 서예인의 또렷한 독립 기상을 볼 수 있고 그의 정신과 고결한 품성을 나타낸 묵적은 시대의 변화를 넘어 정신을 서예가 어떻게 표현하는가를 보여준다. 운강 배효원은 웅건한 필치로 스스럼없는 묵적을, 죽농 서동균은 세련된 필법의 정수를 볼 수 있다.

석재 서병오는 팔능거사라 불리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시가 제일 능하였고, '조선 500년을 통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시재(詩才)'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의 문인화 중 대나무 그림은 이전의 묵죽과는 확연히 다른, 거침없고 호방한 자신만의 경지를 개척해 '석재죽(石齋竹)'이라 불렸다.

석재 서병오는 크게 두 가지로 그 의미가 있다. 예술인으로서의 활동과 문화행정가이고 교육인으로서 활동이다.

첫째 예술인으로서는 한국근대서화의 전통을 새롭게 정립 완성한 일이다. 그가 배우거나 교류한 사람은 동국진체의 맥을 잇고 있는 팔하 서석지와 완당 김정희의 맥인 흥선대원군 이하응과의 교류를 통해 동국진체와 추사체의 종합과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 의미론적으로는 호남과 경인 그리고 영남의 지역 서체의 종합적 완성이다. 거기에 더 나아가 상해 등을 주유하면서 동북아문화를 적극적으로 결합하여 특유의 서화 완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사단법인 비움서예포럼이 석재 서병오를 이처럼 주목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석재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한국근대서화의 전통을 새롭게 정립했다는 것이다. 그는 동국진체의 맥을 잇고 있는 서석지와 김정희의 맥인 흥선대원군과의 교류를 통해 동국진체와 추사체를 종합한 것은 물론 새로운 서화의 세계를 탄생시켰다. 예술가로서의 많은 일화가 그의 예술혼과 풍류는 간난(艱難)한 시대에 뚜렷한 하나의 희망을 제시하고 전통계승과 예술세계의 진취적 정신의 확대를 발견한다.

둘째로, 석재 서병오가 조직한 '교남시서화연구회'는 근대교육기관으로서도 의미가 깊다. 지금의 대구지역에 거점을 둔 전국적인 문화 예술단체였다. 특히 독립운동가 긍석 김진만, 운강 배효원, 죽농 서동균 등 수많은 걸출한 제자를 양성한 점도 주목된다.

석재 서병오 선생의 예술정신을 넓히는 일은 대구의 국제도시화와 함께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사업이다. 석재 예술상, 석재 기념관 건립, 기념사업회의 시작은 대구의 정체성을 찾는데도 필요하여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사업이다.

송정택 (비움서예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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