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부모로부터 '안 돼'라는 말을 먼저 듣고 자랐다. 그리고 거기에 '왜 안 돼?'하고 되물었을 때 친절한 답이 돌아오는 경우는 대개 드물었다. 이제 부모가 된 우리는 아이에게 '이러저러해서'라는 친절한 설명을 길게 늘어놓고야 비로소 '그러니까 안 돼'라고 말한다. 그러면 아이는 좋은 부모가 되리라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우리를 무참히 짓밟는 결정적인 한마디를 내뱉는다. "그래도."
좋은 부모가 되겠노라 굳게 다짐한 부모일수록 이런 경우 아이를 탓하지 않고 자신의 설명이 충분치 않았다는 생각으로 다시 '그러저러하여'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아이는 이번에도 단호하다. "그래도." 그렇게 몇 번인가의 '그래도' 공격을 받으면 제 아무리 참을 인(忍)을 가슴에 새긴 부모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결국 이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만다. "그래, 너 혼자 '그래도(島)'에 살아!"
장기하의 '별일 없이 산다'에도 '그래도'는 행간으로 숨어 있다. 물론 여기서 '별일 없이'란 '다들 별일로 신나는 세상에 나만 이따구로 별일 없이'일 수도 있지만 노랫말에서처럼 대부분의 경우는 '별일이라고 발을 동동 굴러도 시원찮을 판임에도 그래도 나는 별일 없이'이거나 '이 난분분의 세상에 그래도 다행스럽게 나는 별일 없이'일 것이다.
25년 친구인 50대 독일 남자 둘, 유명작가 하케와 유명 시사주간지 '디 차이트' (Die Zeit) 편집장 로렌초가 작심하고 만나 고백 배틀(?)을 벌이는 장면을 기록한 책, '나는 가끔 속물일 때가 있다'에서도 나는 불편한 '그래도'를 보았다. 학창시절 새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며 사회운동을 했고 부조리한 현실을 글로 고발했던 그들이지만 적당히 묵인하고 타협하면서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 때문에) 사회적으로 성공한 두 남자가 털어놓는 자신들의 '속물근성'에 관한 이야기. 처음 제목을 접할 때부터 느꼈던 불편함의 정체를 나는 책을 덮을 무렵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교묘히 숨어있던 오만한 '그래도','명망 있는 지식인으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나이지만 그래도'였다. 제대로 된 고백록이려면 그 제목은 '나는 가끔 속물일 때가 있다'가 아니라 '(속물로 이 자리에까지 온 나이지만 그래도)나는 가끔 성자일 때가 있다'여야 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황지우 시인의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가 훨씬 더 겸손하고 진정성 있는 고백록이 될 것이다.
'별일 없이 산다'에서의 '그래도'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그래도'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혹은 '외로워도 슬퍼도'의 그것, '쿨' (cool)한 '그래도'이다. 대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하게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쿨하다'고 표현한다. '쿨'이 오늘날 문화를 대변하는 중요 코드가 된 기원을 파헤친 글들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쿨한 태도가 실업률은 높아지고 고용 안정성은 낮아지는 불확실한 시대의 산물이라는 분석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현재의 쾌락에 치중하려는 경향이 쿨이라는 감정을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카르페 디엠' (carpe diem'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광 또한 이러한 '쿨'의 유행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쿨'은 대략 세 가지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첫째는 나르시시즘이고, 둘째는 역설적 초연함이며, 셋째는 쾌락주의이다. 그리고 '그래도'에 담긴 '쿨'은 이 중 역설적 초연함이다. 자신의 감정을 반대로 표현함으로써 감정을 숨기는 전략, 예컨대, 위험한 상황에서 권태로움을 가장하거나 모욕적인 상황에서 거꾸로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 등이다. 요즈음 들어 위악(僞惡)이 위선(僞善)보다 부쩍 자주 회자되는 것도 이러한 '쿨'의 속성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부턴가 '그래도 행복해야 한다'라든가 '그래도 웃어야 한다'는 '그래도'가 행복전도사니 웃음치료사의 이름으로 전파되고 있다. 심지어 억지로라도 소리를 내어 웃으면 그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까지 한다. 그렇게까지 삶이 계속되어야 하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그래도', 김승희 시인의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의 '그래도'는 그래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대도?
김계희(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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