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행복편지] 독한 사랑인가 눈먼 폭력인가

입력 2011-08-30 07:55:45

"쯧쯧, 너도 이제 4학년이 되었으니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다."

아침에 책가방을 메고 나서는 어린 아들의 뒤통수에다 대고 그 어머니가 던진 말씀이랍니다. 김 아무개 어린이의 2011년 3월 2일 일기의 첫 문장인데, 세상에 나와서 이제 겨우 11년을 살아온 아들에게 '좋은 시절'이 다 지나가고 '안 좋은 시절'만 남았다고 하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참으로 끔찍한 악담입니다. 아마도 자식의 장래를 걱정하여 속칭 'SKY'대학을 가기 위한 입시 전투가 바야흐로 시작되니 정신 바짝 차리라는 뜻이었겠지요.

 요즘 아이들의 글 속에 비친 부모의 모습을 보면, 자식의 공부에 관한 한 그들의 생각과 태도는 '독한 사랑'을 넘어 '눈먼 폭력(?)'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이게 공부의 근본인데 아이들 스스로 나서서 배우고 익히는 기쁨을 즐기도록 하는 배려는 거의 없고 오로지 빡빡한 공부 일정에 따라 가혹하게 몰아붙이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만 합니다.

 아이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시험에 대한 압박감입니다. 시험은 아이들에게 무서운 맹수처럼 다가오는 듯합니다. '시험이 자박자박 다가온다. 빠작빠작 한 순간도 쉼 없이 다가온다. 내 어깨를 짓누르며, 목을 꽉꽉 죄며 다가온다. 시험아! 시험아! 어서어서 나를 밟고 할퀴며 지나가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이 맹수가 다가오는 동안, 아이들은 문제집 풀이에 목을 매달아야 합니다. '학교에 갔다 오니 시험공부 하라며 엄마가 문제집을 또 세 권이나 사 놓으셨다'는 아이는 '엄마 땜에 미치겠다'고 토로합니다. 대부분의 문제집의 문제 자체가 문제투성이인지도 모르고 말이지요.

 그리고 시험 당일, 불안과 초조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1분 1초 만에 운동장으로 내달아 느티나무를 끌어안고 하늘을 보며 드디어 끝났다. 난 자유다! 라고 외쳤다'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교문 앞 분식집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한 뒤, 엄마한테 잔소리 들을 걱정은 비닐봉지에 싸서 하늘로 띄워버리고 1천원씩 돈을 모아 노래방으로 직행해서 고래고래 악을 쓰며 스트레스를 풀었다'는 녀석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시험에 주눅이 들다보니 학교 울타리에 무리지어 핀 개나리꽃을 보고도 '아마 쟤들도 새 학기를 맞아 진단평가 시험을 쳤는가 보다. 맞았나 틀렸나 서로 옥신각신 떠들어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아이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은 과외공부의 무게입니다. '학교를 마치고 수학학원에 갔다가 영어학원을 거쳐 일곱 시에 집에 도착해 밥을 먹고 둘러앉아 숙제를 펴는 데 한자 선생님이 오셨다. 금요일에는 피아노 과외가 있고 또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컴퓨터 학원과 속독학원에도 가야한다'니 '머리가 터질 것 같다'는 말이 절규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학원을 한 곳 이상 다니지 못하도록 법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유명한 학원일수록 날마다 시험을 쳐서 재시에 걸리는 아이들을 밤늦도록 붙잡아두는 곳이 많다는데, 어떤 애는 '오늘도 재시에 걸렸다. 친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강의실에서 두 명이 서로 눈길을 피하며 앉아 영어 단어를 외운다. 배도 고프고 처량한 생각이 들어 자꾸만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원 라운지에서 창 너머로 어두운 거리를 바라보며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면서 중학교 과정 선행학습에 짓눌린 12살 초딩의 몸을 깨운다'는 아이들은 또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는지요. 어떤 녀석들은 아예 체념에 젖은 말투로 '망할 놈의 소문들이 이 학원이 좋다 저 학원이 좋다며 날아다니니까 엄마들은 또 애 데리고 이 학원 갔다 저 학원 갔다 애만 반쯤 죽여 놓는 거지. 나도 그 중에 하나다. 그러나 어쩌겠어. 약한 인간이 이따위 것 그냥 해 보자. 이렇게 끌려다닌다고 설마 죽기까지는 하겠어'라고 넋두리를 늘어놓습니다.

 교육은 그 특성상 피교육자의 자유를 구속하는 행위입니다. 강제의 요소가 섞여 있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 강제적 구속 행위가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할 때 그것은 진정한 교육이 아니라 위교(僞敎), 즉 거짓되고 잘못된 횡포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의 일기, 그 행간에 흐르는 공부에 대한 근심, 걱정, 분노, 저항, 굴욕 좌절 등의 농도를 확인하다 보면, 우리 어른들이 부모로서 또는 교육자로서, 교육정책가로서 다음 세대들에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과하는 모든 내용과 모든 방법들이 과연 온당한가, 깊이깊이 성찰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절절해집니다. 견디다 못한 우리 아이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기 전에 말입니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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