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남희의 즐거운 책 읽기] 고래/천명관/문학동네

입력 2011-08-18 14:02:12

시간을 가로지르는 이야기의 힘

"그것은 자신이 살던 집보다 족히 서너 배는 됨직한 거대한 물고기였다. 물고기는 바다 한복판에서 불쑥 솟아올라 등에서 힘차게 물을 뿜어올렸다. 주변에 있던 어부들도 물고기를 보고 놀라 탄성을 질렀다. 금복은 믿을 수 없는 거대한 생명체의 출현에 압도되어 그저 입을 딱 벌린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물고기는 거대한 꼬리로 철썩 바닷물을 한 번 내리치고는 곧 물속으로 사라졌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산동네에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오는 생선장수를 따라 마을을 떠난 소녀 금복은 바닷가에 도착해 우연히 거대한 고래를 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고래에 매혹된 금복은 긴 세월이 흐른 후 고래가 막 물에서 뛰쳐나온 듯 꼬리를 한껏 치켜든 모양의 극장을 짓는다. 고래의 꼬리 부분에 영사실이 있고 머리 쪽에는 영사막이 있어 관객들이 고래 배 속에 해당하는 중간 부분에 앉아 영화를 볼 수 있는 구조의 극장이었다.

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읽었다. 적지 않은 분량의 장편임에도,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단숨에 빨려들게 하는 힘이 있다. 이야기는 여자였으나 이후 남자로 변해가는 금복과 그의 딸 춘희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금복은 '걱정'이라는 거구의 사내와 사랑을 했으며, 그가 죽은 후 4년 만에 그를 닮은 딸 춘희를 낳는다. 춘희는 '통뼈'로 괴력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이상하리만치 순하고 고요한 눈빛 때문에 일찍이 어미에게서 관심을 받지 못한다. 아비 걱정을 닮은 춘희의 눈빛은 금복에게 '칼자국'과 연관된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하여 춘희는 쌍둥이 자매와 한때 서커스단에서 일한 적이 있는 코끼리 점보와 우정을 키우며 외롭게 자라난다.

금복은 원래 돈 버는 재주가 있는데다 배포가 커서 생선장수와 함께 건어물 장사를 해 큰돈을 벌기도 했지만, 진짜로 부자가 된 이유는 천장에서 떨어진 돈벼락을 맞고 나서이다.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 내려앉은 천장 때문에 발견된 그 돈과 땅문서는 사실 국밥집 노파가 벌레처럼 땅바닥을 기어 다니며 한평생 모은 전 재산이었다. 옴폭 들어간 쥐눈에 뭉툭한 주먹코, 썩은 이가 까맣게 드러나는, 워낙 박색인 노파는 그 돈을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렸고, 그 자리에서 다방을 하던 금복이 돈벼락을 맞게 된 것이다. 물론 노파의 저주는 금복을 줄곧 따라다니다가 종국에는 대파국을 부르게 된다.

그 돈으로 금복은 벽돌공장을 짓고, 금복의 다방에서 한없이 가라앉은 눈으로 먼 산을 바라보곤 하던 사내 문(文)은 '모양은 매끄럽고 색깔에는 품격이 있었으며 손끝에 와 닿는 느낌만으로도 얼마나 단단하지 짐작할 수 있는' 벽돌을 구워낸다. 금복의 벙어리 딸 춘희는 벽돌공장에서 의붓아버지 문을 따라다니며 벽돌 굽는 법을 배운다. 훗날 금복이 일구다시피한 마을 평대가 엄청난 참화로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이 죽거나 평대를 떠난 후 홀로 남은 춘희는 본능적으로 벽돌을 굽는다. 그리고 그 벽돌은 훗날 한 뛰어난 건축가에 의해 대극장을 짓는 데 사용되고, 춘희와 사라진 마을 평대는 전설이 된다….

'고래'로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작가 천명관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몸속엔 할머니의 유전자가 남아 흐른다. 생명은 결국 그렇게 이어지는 법이다. 나의 육체 안엔 지난 세기 위대했던 작가들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이야기 또한 그렇게 시간을 가로지르며 생명을 연장해간다."

단편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와 '고령화가족'에서도 이야기꾼 천명관의 솜씨는 유감없이 발휘된다. 엉뚱한 등장인물들이 빚어내는 유쾌한 이야기들과 서머셋 모옴의 단편을 연상시키는 뜻밖의 반전은 책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작가의 표현대로 '현실이 이미 거대한 허구가 된 마당에, 이제 소설이 현실을 포착해내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그의 소설은 여전히 독자를 단숨에 사로잡는 힘을 갖고 있다.

수성구립 용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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