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사] 대구∼구미 낙동강 벨트 활용 '임베디드 SW' 신성장 동력으로…석호익 KT

입력 2011-07-22 07:04:55

석호익 KT부회장
석호익 KT부회장

"나는 운이 좋고 복받은 사람입니다. 공무원으로 일할 때는 IT정보강국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었고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좋은 동료들을 만나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그분들에게 감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탈고(脫稿)를 눈앞에 둔 석호익(58) KT부회장의 회고록 서문의 한 대목이다.

석 부회장은 "공무원을 끝내고 새로운 출발을 했는데 내 인생의 1막을 정리하면서 자신을 한 번 되돌아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내 주변사람들과 후배들에게 감사하기 위해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의 회고록은 독특하다. 자신의 회고록에 실명으로 나오는 주요 인사들에게 원고를 미리 보내줘 그들의 입장에서 본 당시 상황에 대한 반론과 코멘트를 받아서 함께 싣고 서로의 입장이 엇갈릴 때는 당시의 신문기사까지 찾아서 첨부했다. 석 부회장은 "이 회고록은 내 시각에서. 내 가치관에서 본 것이기 때문에 100% 맞다고 할 수는 없을 수도 있다"며 "그분들의 이야기를 싣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석 부회장은 1977년 제21회 행시에 합격, 공직에 입문했다. 첫 발령을 받아 수습사무관생활을 경북 금릉군청에서 마친 그는 1979년 곧바로 체신부로 들어갔다. 당시 행시합격자 대부분이 내무부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상황이었지만 석 부회장은 체신부를 자원했다.

"당시 우리보다 앞서가던 일본에서는 우정청이나 정보통신분야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공직자가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분야의 비중과 중요성이 커질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체신부에서 그는 승승장구했다. 사무관 때부터 '독일병정'이라고 불릴 정도로 악착같이 일을 처리해 낸 그는 그후 국장이 돼서는 '작은 거인''작은 등소평'으로 별명이 바뀌었다. 개혁개방을 통해 중국을 변화시킨 등소평(鄧小平)처럼 석 부회장도 정보통신분야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산업화는 박정희 대통령 시대부터 해온 것이었다면 정보통신은 1980년대 초반에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보다 먼저 이 분야에 눈을 떴고 짧은 기간에 성공을 시켰습니다. 정보통신이라는 용어도 사실 제가 만들어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었는데 저는 '정보고속도로'를 만들자고 제안해 성사시켰습니다."

정보통신에 대한 정부차원의 투자마인드나 기반이 없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1천억원의 정보통신예산을 배정받을 수 있게 된 것도 석 부회장이 우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석 부회장은 "외국에 나가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정보통신 선진국이 되었는지 전 세계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며 "우리나라가 대외지향적이었을 때 국력이 강대한 강국이었습니다. 우루과이라운드(UR)때 (자신이)가장 먼저 개방하자고 한 분야가 통신이었습니다"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80년대부터 고속도로에 통신망을 깔 수 있는 경관로를 함께 깔고 데이터 통신회사를 별도로 만든 나라는 전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최초였고 주파수를 민간에 팔고서 정보화촉진기금(지금은 방송발전기금)을 만들어 IT분야에 투자할 수 있도록 정보화촉진법을 만든 것도 우리나라밖에 없다. 우리나라 정보통신 발전의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주역 중의 한 사람이 그였다.

그는 "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20%는 정보통신분야 몫"이라면서 1998년 IMF사태 때 우리나라가 IMF와 외국으로부터 약속받은 자금이 583억달러였지만 실제 195억달러만 들여온 것도 따지고 보면 IT분야에서의 무역흑자 710억달러 때문이었습니다"고 밝혔다.

대구경북의 신성장 동력에 대해서는 그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섬유를 하더라도 IT와 결합, 최첨단 고급화하고 대구와 고령,성주, 칠곡, 구미 등 낙동강 벨트를 잘 활용한 '임베디드 소프트웨어'를 발전시킨다면 대구경북의 신성장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고령화되고 있는 우리 농촌도 IT화해 '스마트 농촌'을 만든다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자신했다.

어릴 때 가난한 살림에 어머니 젖 대신 누님의 젖을 얻어먹었지만 키가 크지 않았던 그는 누구보다 장난이 심한 개구쟁이였다. 그러나 칠곡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당당하게 학생회장을 지내는 등 친구들 사이에서 최고의 사나이였다.

체신부에서 공무원생활을 시작, 청와대에 두 번이나 파견 근무를 했고 정보통신부 정보통신정책심의관, 전파방송관리국장, 정보화기획실장, 기획관리실장, 서울체신청장 등을 지냈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 총선에 출마했다가 실패한 후 KT부회장으로 다시 천직인 IT분야로 되돌아갔다.

"지금까지의 경험과 경륜을 바탕으로 지역과 국가, 특히 정보통신분야 발전에 보다 더 기여하는 길"이 그의 희망이다.

성주가 고향이지만 칠곡 순심중고와 영남대, 서울대 행정대학원(석사), 성균관대 대학원(행정학박사)을 졸업했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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