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2)오철환 대구시의원의 구미 도개

입력 2011-07-09 07:26:57

친구들 모아놓고 호기롭게 "오늘은 우리밭 수박 서리할까"

오철환 대구시의원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경북 구미시 도개면 가산리 원흥마을을 둘러보고 있다. 학교가 마을 뒷산 너머에 위치해 아이들은 매일 뒷산을 오르내리며 초등학교를 다녔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오철환 대구시의원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경북 구미시 도개면 가산리 원흥마을을 둘러보고 있다. 학교가 마을 뒷산 너머에 위치해 아이들은 매일 뒷산을 오르내리며 초등학교를 다녔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지금은 폐교돼 을씨년스런 동산초등학교 운동장 한쪽에 그때 꽃가락지를 만들던 그 클로버 꽃이 피어나 유년시절 짝사랑 친구의 기억을 토해내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지금은 폐교돼 을씨년스런 동산초등학교 운동장 한쪽에 그때 꽃가락지를 만들던 그 클로버 꽃이 피어나 유년시절 짝사랑 친구의 기억을 토해내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뒤쪽은 나지막한 안산(案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쪽은 낙동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구미시 도개면 원흥마을은 누가 보아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산의 이름에 책상 안(案)자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괜찮은 문필가 하나쯤은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뒷산을 바라보노라니 민둥산을 넘어가는 책보를 둘러멘 내 모습이 선명하다. 뒷산 너머에 있던 동산국민학교(현 동산초등학교)에 다녔다. 학년별 마을별로 담임선생님이 대장을 정해주었는데 힘도 세고 공부도 잘하는 그 마을의 실력자를 공적으로 승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장은 학교에서 마을까지 안전한 귀가를 책임지고 있었다. 남자 아이가 여자 아이를 괴롭히거나 짓궂게 굴면 여자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대장은 가끔 남자로서 입장이 곤란한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나는 항상 여자아이들 편을 들어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꽤 좋았다. 남자아이들에겐 비록 밥맛이었겠지만. 한번은 군기를 잡다가 완력이 좋은 친구의 도전을 받아 산꼭대기에 있는 무덤가에서 주먹다짐을 했다. 친구의 힘과 경사에 밀려 구덩이에 엉덩이가 처박혀 꼼짝달싹도 못하게 되자 항복한다는 다짐을 하고 빠져나온 후, 그 친구에게 주먹질을 한 적도 있었다. "엉엉, 졌다 캐놓고 왜 때리노!" 그 친구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정말 서럽게 울었다. 그 당시 어린이들의 싸움에서는 코피를 내거나 넘어뜨려 위에 올라타면 이기게 되는 것이 묵시적 약속이었음을 고려한다면 나의 행동은 매우 비겁했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산기슭 공동묘지 앞 얼룩덜룩 이끼 낀 바위를 호랑이로 잘못 보고 혼비백산하여 산을 가로질러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책보에 들어있던 책과 필통을 다 잃어버려 할아버지께 혼이 났던 일도 있었다. 책보는 네모난 보자기에 책을 둘둘 말아 허리춤에 매거나 등짝에 대각선으로 둘러메기도 했는데 도시락에서 김칫국물이 새기 일쑤였고, 뛰기라도 하면 도시락 속 젓가락 달가닥거리는 소리와 필통 속 연필 딸깍거리는 소리가 바쁜 발걸음에 장단을 맞춰주었으며, 삔침을 제대로 꽂지 않아 책이나 학용품 따위를 잃어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덕분에 할아버지는 내 헌책을 사러 대구역 지하도에 있었던 헌책방 거리에 자주 가셔야 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후에 망태기를 메고 꼴을 베러 가기도 하고 소를 몰고 낙동강변의 숲으로 풀 먹이러 가기도 했다. 소를 숲에다 풀어 두고 나무 그늘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소를 잃어버려서 어둑어둑할 때까지 소 찾으러 온 숲을 헤맨 적도 있었다. 결국 못 찾고 잔뜩 겁을 먹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렇게 찾아 헤매던 우리 소가 외양간에서 빙긋이 웃고 있지 않는가! 그 소가 얼마나 고맙고 반가웠던지!

어둠이 내리면 집집마다 호롱불이 켜졌다. 호롱불 아래서 어머니는 의레 바느질을 했고 우리들은 손을 이용하여 그림자놀이나 묵찌빠를 하다가 입이 심심하면 고구마나 무를 깎아 먹었다. 그래도 심심하면 사랑방으로 건너가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고 그때마다 할머니는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으셨다. '혹부리 영감', '나무꾼과 선녀', '견우와 직녀'…… 그때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들은 평생 나의 삶의 자양분이 되었다. 밤이 긴 겨울밤에는 또래별로 한 집에 모여 화투를 치기도 했는데 내기할 돈이 없었으므로 진 사람에게 벌칙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김치서리, 무서리 등을 해오거나 '맛방' 때리기, 공동묘지에 갔다 오기, 상엿집에 갔다 오기, 여자친구 데려오기 등이 주요한 벌칙이었다. 상엿집은 상여와 제기 등을 보관해둔 집으로 마을 어귀의 산모퉁이에 있었는데 어린이들이 무서워하는 곳 중의 하나였다. 죽은 사람의 시신을 싣고 나른다는 사실과 상여의 울긋불긋한 무늬가 무서웠던 것 같다. 상엿집을 지날 때면 대낮에도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마구 내달리곤 했으니까.

우리는 풀밭에서 '삐삐'를 뽑아먹었고, 사루비아를 따 꽃 아랫부분에서 단물을 빨아먹었다. 나는 진달래꽃을 좋아했는데 진달래꽃을 꺾으러 낭떠러지까지 갔다가 막상 꺾고 보니 진달래꽃과 비슷하게 생긴 철쭉꽃이어서 헛수고한 경우도 있었다. 철쭉꽃은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실망이 컸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먹을 수 없는 영산홍이나 철쭉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먹을 만한 꽃으로 흔하고 풍성하기로는 아카시아 꽃만 한 것이 없었는데 아카시아 꽃을 정신없이 따먹다가 가시에 손가락이 찔려 퉁퉁 부어오른 끝에 결국 손톱까지 빠지는 보복을 당하기도 했다. 감꽃도 좋은 간식거리였다. 온 동네 감나무를 돌며 떨어진 감꽃을 주워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고, 이것을 몇 개씩 주렁주렁 목에 걸고 다니다가 수시로 빼먹곤 했다. 새벽에 돌면 깨끗하고 싱싱한 감꽃을 많이 주울 수 있어서 가을이면 눈뜨자말자 동네 감나무를 죄다 찾아다녔다. 떫은 듯 상큼하고, 순박한 듯 착한 그 고향의 맛을 지금 그 어디서 다시 맛볼 수 있을까. 그 당시 나에게 있어서 착한 꽃의 판단기준은 그 아름다움이 아니라 꽃의 식용여부였다. 면화가 피기 직전의 봉오리도 맛이 일품이었는데 그걸 따먹게 되면 그해 면화 농사는 망치게 되는 것이다. 어설프게 따먹다가 면화밭 주인한테 걸리는 날엔 진짜 혼이 났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매우 커서 많이 따먹지 못했다. 뽕나무 열매인 오디도 당시 인기 있는 군것질거리였는데 뽕나무에 올라가 셔츠 끄트머리를 입에 물고 오디를 따 담은 관계로 셔츠가 온통 시뻘겋게 물들어 어머니에게 야단맞곤 했다. 마을 뒤쪽에 제법 큰 뽕나무밭이 있었는데 주목적이 뽕잎이었기 때문에 오디는 동네 얘들이 따먹을 수 있게 놔두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같이 우리 집 수박을 서리하다가 들켜서 할아버지한테 쫓겨 달아났던 기억이 난다. 그 날 저녁 나는 바짝 겁을 먹고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집에 들어갔지만 할아버지는 나를 보고도 빙그레 웃으시기만 하셨다.

동네 뒷산 입구 참나무 아래에 큰 너럭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우리는 거기에 모여 소꿉놀이를 하며 놀았다. 깨진 사금파리를 그릇 삼고 모래나 흙으로 밥을 짓고 각종 풀을 빻아 반찬을 만들어 앞집의 남숙이와 여보, 당신하며 알콩달콩 놀았던 기억이 새롭다. 남숙이는 지금 누구와 함께 놀고 있을까?

마을에 잔치나 초상과 같은 큰일이 생기면 동네 아주머니들은 자기 아이에게 전 따위를 챙겨주느라 조금 부산을 떨었다. 어머니가 자리를 비웠을 때 어머니 대신 나를 챙겨주셨던 이웃집 아주머니의 순박한 정이 아직까지 내 가슴으로 전해진다. 이렇게 동네 아주머니들과 아이들이 야단법석을 떨며 어우러져야 비로소 잔칫집이 활기를 띠게 되는 법이었다.

원흥동네에서 의성으로 낙동장을 보러가려면 산 너머 용대미로 나가 버스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야 했다. 낙동강 나루에는 큰 나룻배가 있어 버스도 배에 태워 날랐다. 버스에서 승객을 내리고 배에 버스를 태운 다음, 승객도 배에 태워 강을 건너던 모습은 매우 희한하고 인상적이었다. 그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보고 싶은 마음에 낙동장에 가려고 집을 나서던 할머니를 따라나선 적이 있었다. 형만 데리고 가려는 낌새를 눈치 채고 발을 동동 구르며 죽으라고 울었는데도 할머니는 나를 끝내 데리고 가지 않으셨다. 나를 떨치고 치마를 감아쥐고 도망치다시피 뛰어가던 야속한 할머니의 뒷모습과 혀를 날름거리며 뒤돌아보던 형의 얄미운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버스를 태우고 강을 건너던 그 낙동강 나룻배를 아직 한 번도 타보지 못했다. 뱃사공이 노를 강바닥에 공구고 뱃전을 달리며 배를 띄우던 낙동나루는 벌써 자취를 감추었고 대신 육중한 낙단대교가 들어서 그 위로 차들이 씽씽 달리고 있다. 옛날과 같이 나룻배로 버스를 실어 옮기는 낙동나루를 복원한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해서든지 꼭 한 번 타볼 생각이다.

나는 지금도 이원수 선생이 지은 '고향의 봄'을 들으면 나의 고향, 원흥마을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괜스레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그 속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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