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라이온즈 열정의 30년] ⑫1986년 해태 선수단 버스 방화사건

입력 2011-07-04 09:21:50

안방 역전패에 관중 분노 폭발

불타고 있는 해태선수단 버스. 매일신문 자료사진
불타고 있는 해태선수단 버스. 매일신문 자료사진

1980년대 삼성 라이온즈 팬들의 성향은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 같았다. 또한 뼈대 깊은 가문의 자존심처럼 곧고 강직했다. 삼성이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과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은 팬들에게 가슴을 누르는 응어리로 남았다.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1986년 해태와 맞닥뜨린 한국시리즈였다. 그해 해태는 전'후기 2위로 한국시리즈에 선착했고, 삼성은 전기 1위, 후기 4위로 OB베어스와 플레이오프를 거쳐야 했다. 7전4선승제의 한국시리즈는 그해 프로야구의 최강팀을 가리는 의미로 국한되지 않았다. 삼성 팬들에겐 '무관의 한'을 풀어내는 무대였고, 그 상대가 소백산맥 너머 절대로 섞일 수 없는 호남의 해태라는 점에서 반드시 이겨야 했다. 이는 해태 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일이 터졌다. 10월 22일. 한국시리즈 3차전이 열린 대구에서였다.

장태수 삼성 수석코치는 "경기가 열리기 전부터 관중석은 시끌벅적했다. 해태 선수들이 몸을 풀 때 투박한 경상도 억양의 욕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술렁거림이 그라운드를 감쌌다. 살벌한 기운이 느껴졌다"고 했다.

1회 말 이만수의 적시타로 선취점을 올린 삼성은 김성래의 좌중월 2점 홈런으로 앞서나가며 축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2회초 홈런 2방에 동점이 되자 분위기는 급속히 냉랭해졌다. 팽팽한 투수전은 7회 초 김성한의 안타 등으로 해태가 3점차로 앞서나가며 깨졌다. 삼성은 곧바로 장효조와 이만수의 적시타로 2점을 쫓아갔지만 더는 힘을 내지 못했다. 팬들은 폭발할 시점을 찾고 있었고, 9회 말 종료가 신호탄이었다. 역전패를 지켜본 관중들은 빈병과 깡통을 그라운드로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쓰레기통은 각종 오물을 쏟아냈다.

이어 오후 9시 45분. 분을 삭이지 못한 관중 2천여 명은 "타도 해태"를 외치다 주차장에 세워진 45인승 해태 선수단 버스를 발견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김석준(51) 씨는 "어디선가 날아든 돌멩이가 유리창을 깼다. 그 틈으로 나부낀 커튼에 불이 붙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버스가 화염에 휩싸였다"며 "광기 어린 군중의 환호에 어린 학생들이 메케한 연기에 코를 막고 종종걸음을 쳤다"고 했다. 군중은 오후 11시 시위진압 장비를 동원한 경찰이 최루탄을 쏘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경기장 관리실에서 숨죽였던 해태 선수단은 오후 11시 5분쯤 경찰차에 편승, 숙소인 수성관광호텔로 돌아갔다.

관중 일부가 대구 북부경찰서로 연행돼 밤샘조사를 받았다. KBO는 간부회의를 소집, 이튿날 열릴 대구경기 진행 여부를 논의했다. 대구경기 재개 여부는 23일 오전 11시, 정상 진행으로 결정 났다.

해태 선수단 버스 방화 사건은 광주서 열린 1차전(19일)에서 잉태됐다. 김시진의 부진, 황규봉의 팔꿈치 고장, 김일융의 플레이오프 연투로 양일환'성준'진동한이 이어 던진 삼성은 7회 초 김성래의 좌월 2점 홈런으로 선동열의 해태에 앞서갔다. 특히 3회 말 2사 1, 3루서 구원 등판한 진동한은 7회 말까지 3안타만 허용하며 실점치 않았다. 그대로 삼성의 승리가 굳어지는 듯했다. 그때 에이스에 대한 집착이 유별났던 김영덕 감독이 8회 말 김시진을 투입했다. 그러나 김시진은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실점했고 9회 말 동점에 이어 11회 말, 김성한에게 끝내기 역전 적시타를 내주고 말았다.

경기가 끝난 뒤 "잘 던지던 투수를 왜 바꿨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김영덕 감독은 "진동한이 7회 말 투구를 마친 후 관중이 던진 병에 맞아 김시진으로 교체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7회 말, 투구를 마친 진동한이 이마의 땀을 닦으려 모자를 벗는 순간 더그아웃 위편에서 소주병이 날아와 머리를 내리쳤고 이 때문에 더는 마운드에 올리기 어려웠다는 김 감독의 말에 대구 팬들은 1차전 패배가 소주병 탓이라 여겼다.

최종문 대구방송 해설위원은 "당시 삼성팬들은 큰 경기에 약하다는 징크스를 갖기 시작할 무렵이었다"며 "1차전 패배의 원인을 해태 팬들에게서 찾은 대구 관중들은 보복을 노리고 있었고, 3차전 삼성이 안방에서 1차전 때처럼 역전패하자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고 했다.

희대의 사건 속에 삼성은 그해 한국시리즈서 1승4패로 무너졌다. 다음해 또다시 한국시리즈서 해태와 만나 0대4로 완패했다. 1989년엔 빙그레와의 플레이오프서 0대3으로 지며 해태의 4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지켜봐야 했다. 1988년 초유의 감사로 시작된 후폭풍(트레이드) 또한 매머드급이었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