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의 혼] 제2부-신라정신 8)다문화 사회, 개방의 나라

입력 2011-06-10 07:38:12

'깊은 눈 높은 코' 異邦 서역인들이 신라 왕릉을 지키는 까닭은?

경주 안강의 수천 그루의 춤추는 듯한 소나무 숲속에 가려져 있는 흥덕왕릉의 무인석상과 문인석상은 괘릉처럼 이방인 모습이지만 크기가 조금 더 큰 것이 특징이다. 이채근기자
경주 안강의 수천 그루의 춤추는 듯한 소나무 숲속에 가려져 있는 흥덕왕릉의 무인석상과 문인석상은 괘릉처럼 이방인 모습이지만 크기가 조금 더 큰 것이 특징이다. 이채근기자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이란 사산왕조의 문양이 새겨진 돌의 원안에는 나무 아래 공작새 두 마리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진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이란 사산왕조의 문양이 새겨진 돌의 원안에는 나무 아래 공작새 두 마리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진'이채근기자

다문화 사회, 개방의 나라 신라

"1024년 9월에 대식국(大食國'아라비아)의 열나자(悅羅慈) 등 100인이 와서 방물(方物)을 바쳤다. 1025년 9월 대식 오랑캐인 하선(夏詵), 나자(羅慈) 등 10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1040년 11월 대식국 객상인 보나합 등이 와서 수은, 용치(龍齒), 대소목(大蘇木) 등을 바쳤다. 유사에게 명하여 관(館)에서 후대하게 하고 돌아갈 때는 금(金)과 비단을 많이 주었다."

고려사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슬람인들의 우리나라에 대한 방문 기록은 고려사부터 나타나고 있다. 신라 때의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랍 이슬람인과 서역인 등 이방인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어 기록보다 더 생생하다.

◆신라에 온 이방인들은 누구?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산이 많은 나라가 있다. 그곳에는 금이 풍부하다. 이 나라에 와서 영구 정착한 이슬람 교도들은 그곳의 여러 가지 이점 때문에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이슬람 문헌 중 864년쯤 페르시아인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820~912)가 쓴 '제(諸) 도로 및 제(諸) 왕국 안내서'는 신라를 이렇게 기록했다. 10세기 중엽 출간된 알 마수오디의 '황금 초원과 보석광'에서는 "이라크 또는 다른 나라로부터 그곳으로 간 외국인은 공기가 맑고 물이 좋고 농토가 비옥하고 또 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원성왕 11년(795년) 당(唐)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사람 둘을 데려와 동해의 두 용(龍)과 분황사 우물의 용을 잡아간 것을 왕이 풀어주도록 했다'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하서국인이 바로 이슬람인들이다. 사마르칸트나 타슈켄트 중심으로 한 소그디아나 지역의 소그드인(우즈베키스탄인)이나 투르크인, 위구르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속독(速毒)으로도 표기되는 소그디아나는 최치원이 기록에 남긴 '향약잡영5수'에도 나온다. 기록에 남아있을 만큼 '속독악'(速毒樂)이 유명했는데 처음 이 음악이 소개될 때는 '소그드인'들이 직접 경주에서 공연했을지도 모른다.

원성왕(?~798)과 흥덕왕(?~836)의 능(陵) 앞에 있는 무인석상(武人石像)은 서역인, 아라비아인, 혹은 '눈이 깊고 높은 코'(深目高鼻'심목고비)와 많은 수염을 인물 특징으로 하는 소그드인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무인상의 머리띠와 관련, 사산 페르시아 왕조에서 이란인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다녔다는 점을 들어 이란인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원성왕릉인 괘릉의 문인석상(文人石像)과 흥덕왕릉 문인석상을 위구르인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경주 용강동 출토의 홀(笏)을 든 문관토용(土俑)도 이와 비슷한 외래인 문관의 모습이며 경주 구정동 방형분에서 출토된 석조 무인상 역시 서역인의 형태를 나타낸다.

삼국사기에는 헌강왕(?∼886) 시절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가(御駕) 앞에 나아가 노래하며 춤추는데 그 생김새가 놀랄 만하고(形容可駭) 옷이 이상하여(衣巾詭異) 그때 사람들이 산해의 정령(山海精靈)이라 일컬었다'는 내용의 인물도 아랍인 또는 이슬람인으로 해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헌강왕 때 개운포에서 길 잃은 왕이 만난 동해 용과 7명의 자식들 중 한 명을 조정에 데려가 벼슬을 내리고 미녀와 살게 했다'는 '처용'(處容)과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한다. 처용의 정체와 관련해서는 실존 인물이라면 이방인 또는 지방 호족세력 자제로 해석하는 등 의견이 제각각이지만 '벽해'(碧海)에서 온 이방인으로 보는 시각들이 많다.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정수일(무함마드 깐수) 소장은 "동해 용은 동해를 통해 신라에 상륙한 기이한 자연인, 외인이라고 간주해도 거의 틀림없을 것"이라며 "'깊은 눈과 높은 코'의 이방인이 한반도에 왔다면 십중팔구 무슬림 상인이었을 것"이라며 처용을 무슬림으로 봤다. 그는 자신의 책 '신라'서역교류사'에서 "중국문화권 밖에서 1천100여 년 전 처음으로 신라를 알고 그 존재를 인정하여 서방 세계에 소개한 사람들은 아랍'무슬림들이었다"며 "신라와 아랍'이슬람 제국 간에 내왕과 더불어 여러 교류가 진행됐다"고 했다.

◆異邦人들의 나라, 신라

"우리 한국 민족도 5, 6종(種)의 합성이다. 여기의 주체는 만몽(滿蒙) 퉁구스족(族)이고, 그 다음에 한족(漢族), 여기에 약간의 인도족(印度族), 코카서스족, 왜족(倭族), 반도토족(半島土族) 등이 있다. 민족은 다른 종족이 많이 합해 단일한 민족으로 된 것이지 순전히 한 종족만인 단일한 민족은 없을 것이다."

광복 이후 새로운 윤리 정립에 앞장섰던 학자 범부 김정설은 우리는 단일 종족이 아니라고 했다. 신라도 그랬다. 6부족의 신라는 박(朴)씨의 시조인 혁거세 거서간을 첫 지도자로 삼은 이후 마지막 56대 경애왕까지 박씨 왕과 각각 '바다'와 '북방' 유래설이 있는 석(石)씨 임금과 김(金)씨 왕이 1천 년 동안 번갈아가며 다스린 국가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 체제로의 재편 과정에서 다양한 종족들이 삼국에 흡수됐고, 통일 과정에서는 고구려, 백제 백성들의 망명과 이주 등에 따른 이합집산과 서역'아랍인 등 외국인들까지 겹쳐 신라는 '이방인(異邦人)의 나라'가 됐다. 신라는 국초(國初)부터 6부족 세력들의 집합체였고, 통일 이후 더 많은 세력들이 합류하면서 더 다양한 색깔의 나라가 됐다.

신라 경주는 100만 명이 사는 국제도시로 이목구비가 서로 다른 동서양의 사람들이 어울려 다니는 붐비는 왕경이었다. 그 외국인 속에는 중국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이 전하는 것처럼 서역승과 당나라의 승려들도 섞여 있었다. 100개 가까운 나라의 외국인 200만 명이 사는 오늘날의 한국은 아닐지라도 당시 경주는 이국적 다문화 도시였다.

강원대 김창석 교수는 논문에서 "7세기에 등장하여 동방으로 세력을 뻗어온 이슬람인과 그 문물은 신라인에게는 새롭고 이질적인 문명과의 만남이었다"면서 "8세기 이후 신라를 찾은 이들은 국제 교역상인과 무용수, 악사 위주였다"고 분석했다.

이방인들의 신라 입출입 창구는 경주에서 걸어서 불과 하루 거리(40㎞)로, 당시 국제 항구였던 울산만의 항구였다. 울산만은 삼국 이전 일찍부터 철(鐵), 동(銅)제품이 많이 생산된 탓에 수출항구였다. 박제상(朴堤上)이 일본에 인질로 있던 내물왕의 셋째 아들을 구하러 출발한 곳이고, 삼국유사에 나오는 서천축국(西天竺國)의 아육왕(阿育王)이 불상을 실어보낸 '거대한 배'(一巨舫)가 이르른 곳이고, 자장(慈藏'590∼658)이 당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곳이기도 하다. 7세기 후반 옛 사마르칸드의 아프라시압 도성의 벽화에 새겨져 있는 외국인 사절단 가운데 새깃 같은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환두대도(環頭大刀)를 찬 2명의 신라인 추정 사절단과 진흥왕 때(695년) 신라인 최초로 일본에 파견된 천일창(天日槍), 돈황석굴 335호굴 벽화에 새겨진 신라인으로 추정되는 2명 등 신라대표들의 출발지도 이곳이었으리라. 신라는 여러 종족, 여러 민족의 다양한 문화가 함께 어울렸던 글로벌 국가였다.

정인열 기자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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