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옛 도심, 이야기로 살아난다] ⑮빼앗긴 나라와 자갈마당

입력 2011-04-09 07:55:00

혼담 오갔던 그 처자는 이제 퀭한 눈의 낯선 여인이 되어…

1900년대 초기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은 거류민단을 형성하고 상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당시 조선 거주 일본인 중에는 남성이 대부분이었고, 속칭 \
1900년대 초기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은 거류민단을 형성하고 상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당시 조선 거주 일본인 중에는 남성이 대부분이었고, 속칭 \'자갈마당\'은 이들을 위한 성매매 시설에서 비롯됐다.
김계희(그림책 작가)
김계희(그림책 작가)

가슴이 미어지는 일이었다. 그 통통하던 뺨이 움푹 꺼지고 눈가가 축 늘어진 모양새가 병이나 걸린 데 없나 의심스러웠다.

"어디 아픈딘 없소?"

"이런 팔자에 병까지 걸려서야 어찌 쓰것소."

"돌아온 지 얼마나 되앗는감?"

"한 오륙 년 되앗소. 모친은 안녕하시지예?"

"하매 돌아가셨구마. 북간도서. 흰 죽 한 그릇 못 자시고 가셨구마."

"그랬구만요."

"칠성이는? 벌써 스무 살이 넘었을 긴데?"

"지가 떠나고 몇 년 후에 가족들도 고향을 떠나서 소식이 끊어졌구만요. 기별이 된다 해도 지가 뭘 해줄 수가 있었겠소."

"다 시절을 잘못 만난 탓이구만…."

가마니 사십 장을 짜면 보리쌀 한 말을 팔 수 있었다. 손이 빠른 이는 하루에 열 장을 짜기도 했지만 순봉은 가마니 사십 장에 엿새가 걸렸다. 엿새 걸려 얻은 보리쌀 한 말은 엿새 만에 바닥이 났다. 밤낮 가마니를 짜느라 순봉의 손바닥은 마른 볏짚처럼 거칠었다. 굶주림에 칭얼대는 아이의 등을 맨손으로 쓰다듬으면 누이의 손바닥에 가시처럼 돋은 살갗에 아이는 더욱 울음을 울어 제쳤다.

"이러키 울어서야 힘이 빠져서 우야겄나? 이러키 힘을 써대면 창자에 쌓인 보리죽이 금세 밑구녕으로 빠져나오지 않겠나 말이다."

아이가 울 때마다 순봉의 아버지는 순봉이 들으라는 듯 역정을 냈다.

"똥도 아끼라, 눈물도 아끼라, 몸에서 나오는 건 뭣이라도 무조건 아끼야 된다."

그리곤 잦아드는 소리로 말을 잇곤 했다.

"그래도 너는 여자 아니가? 여자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이 있다 안 하나. 가마니만 짜고 앉아서 동생들 밥은 우예 먹이겠노 말이다."

순봉은 우는 칠성을 업고 밖으로 나갔다. 하늘엔 잔별이 가득했다.

"칠성아, 하늘 좀 봐라. 하늘에 별이 쌀밥맹키 하얗다. 누나는 내일 먼 데로 간다. 아주 아주 먼 데로 간다. 가서 돈 많이 벌어 칠성이 쌀밥도 사주고 학교도 보내주고…."

순봉은 목이 메어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들은 말로는 거기를 자갈마당이라 부른다고 했다. 진 땅에 발목이 빠지지 않게 자갈을 퍼다 깔았기 때문이라고도 했고, 자갈 밟는 소리에 여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도 했다. 순봉처럼 가난 때문에 팔려온 여자들과, 죽지 못해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여자들이 적은 나이로는 열다섯부터라고 했다. 여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할 만큼이라면 그곳은 얼마나 무서운 곳일까? 순봉은 꿈속에서도 찰각찰각 자갈 밟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 소스라쳐 잠이 깨곤 했다.

대구 근교 순봉의 고향 사람들은 역둔토(驛屯土)를 부쳐 먹으며 여유롭지는 않지만 평화롭게 살았다. 하지만 1905년 통감부가 설치되고 국유지 정리 사업이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주도되자 조선의 광대한 민전이 약탈당하기 시작했다.

농민이 부치던 역둔토는 일본이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가 되고, 일본은 약탈한 토지를 조선인 농민에게 빌려주어 50%가 넘는 소작료를 징수하고, 영세 소작농에게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추수 때 20% 이상의 고리를 현물로 거둬들이는 등 착취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게다가 지주 측인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소작인과의 접촉이 성가시다는 이유로 지주와 소작인 사이에 일본인 중계소작인을 내세워 소작료를 거두게 했고, 결국 소작인은 지주와 중계소작인에게 소작료를 모두 빼앗겨 소출의 이삼 할도 손에 쥐지 못하게 되었다. 경술국치 10년 만인 1920년 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 토지가 3억 평이라는 광대한 규모로 커진 것은 바꾸어 말해 그만큼 조선 농민의 굶주림이 커졌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또한, 일본 농민이 조선에 대거 이주해 한정된 조선의 농토에 과잉인구가 생기게 되자, 일본은 조선인이 고율의 소작료를 견딜 수 없게 만든 다음 미개척 땅에 이주시키는 정책을 썼다. 토지를 상실하고, 농사를 지을수록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서 1925년경 30만 명이나 되는 조선인들이 북간도로 이주했다. 순봉과 혼담이 오가던 병삼 또한 그러한 이유로 가족들과 북간도 이주에 참여했다. 남아 있던 고향 사람들은 볏짚으로 가마니를 짜서 입에 풀칠이나 하는 정도였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장성한 딸을 도시에 있는 유곽으로 팔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절이 시작되었다.

다시 돌아오마던 병삼이 떠난 지 2년 사이, 80호나 되던 집들이 채 서른 채도 남지 않게 되었으니 기별 없는 병삼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경부선 철도가 대구에 개통되고 일본인 장사치들이 대구로 몰려들자, 통감부는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 거류민단을 설치했고, 거류민단은 대구 읍성을 철거한 후 역 주변 도원동 지역에 성 매매 전용 업소인 유곽 설치를 첫 번째 사업으로 시작했다. 남성의 수가 월등히 많았던 일본 거류민들의 매음을 위한 자갈마당이라 불리는 집창촌에는 순봉과 같이 가족에게 떠밀려 팔려오거나, 죽지 않기 위해 제 발로 걸어온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몸값 30원에 팔려온 여자들이 아무리 몸값을 갚아도 빚은 오히려 늘어나 그 생활을 청산할 수가 없었다.

순봉도 마찬가지였다. 열일곱 나이에 팔려간 순봉이 11년 동안 일을 했지만 빚은 줄어들지 않았고, 결국 나이가 많아지자 주인이 빚을 탕감해 주었다. 11년 만에 돌아온 고향에는 고향 사람의 자취는 찾을 수 없고, 무너진 흙담에 잡초만 무성했다.

"이곳서 무얼 먹고 사는가?"

"거게 있을 때 일본말을 좀 배웠소. 일본 사람 집에서 일을 봐주고 밥을 얻어 먹구만요."

병삼은 가슴이 답답해 탁주를 사발째 들이마셨다. 타지를 떠돌다 고국에 돌아온 병삼은 고향을 둘러보고 도시로 일감을 찾아 떠날 참이었다. 그러던 중 어린 시절부터 집안 어른들끼리 혼담이 오고 가던 순봉과 마주친 것이었다.

병삼은 순봉을 마주하고는 그 따스하고 평화롭던 기억들이 생각나 가슴이 복받쳐 올랐다. 얼마나 이곳을 그리워했던가…! 하루에도 수없이 오가던 골목길, 기웃거리던 이웃의 마당, 마을 처녀들의 싱싱한 웃음소리와 아이들의 천진하던 비밀들….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병삼에게 삶의 규범 같은 것을 주었었다. 하지만, 병삼은 순봉과 자신이 과거의 그 세계에서 이제 완전한 이방인이 되었음을 실감하며 뼛속 깊이 외롭고도 추워지는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어떤 위로를 나눌 수 있단 말인가? 살기 위해서 가족을 따라 북간도로 가던 날, 그 저녁부터 다음 날 아침의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그날을, 부모를 잃고 신의주로 단동으로 품을 팔러 다니다가 급기야 일본의 구주 탄광과 대판 철공소를 떠돌며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그날을, 낯선 땅에 쫓겨 가서도 소작료에 뜯겨야 했고, 만주와 일본을 떠돌며 지옥 같은 중노동을 해도 임금의 반도 받지 못하던 굶주린 생활을, 그리고 고향에선 막다른 지경에 몰린 여자들이 생계를 위해 성(性)을 수단으로 삼아야 했던 그날들 앞에서 어떤 위로를 나누어야 한단 말인가? 그때 병삼과 같이 고향을 등져야 했던 사내들이 한둘이었으며, 순봉과 같이 팔려가야 했던 여인들이 한둘이었던가.

하지만, 그때 순봉은 열일곱이었다. 솜털도 벗겨지지 않은 살구 같던, 물동이 인 젖은 낯빛이 냇물처럼 맑았던 열일곱이었다. 굶주려 우는 동생에게 보리죽이라도 배불리 먹이고 싶었던, 그 밑물처럼 맑던 처녀가 얼굴도 모르는 사내들 속에서 돼지처럼 피를 철철 흘리며, 그 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쑥국새 소리 꿈처럼 들려오는 밤이면 헤어진 동생들과 고향 동무들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하지만, 이제 이렇게 뺨이 움푹 파이고 눈이 퀭한 여인이 되어, 머리가 벗겨지고 눈 밑에 그늘을 드리운 사내가 되어, 자취도 찾을 수 없이 무너진 옛터에서 어떤 추억과 후회와 통한을 나누어야 한단 말인가?

병삼은 순봉의 팔목에 지져진 담배 자국을 보며 오장육부에서 차오르는 노여움에 속이 메슥거렸다. 병삼은 무언가 입을 떼려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몸 성히 살아만 있으소. 살아 있다 보면 좋은 날도 오지 않겠는가."

고샅을 나오며 뒤돌아보자 순봉이 나무 밑에서 휘적휘적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병삼은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멀거니 바라보았다.

의지할 곳을 한순간에 모두 빼앗기고 저이 혼자 이 길을 어찌 걸어왔을까?

무너지는 다리, 그 마음으로 춥고 서러운 그 길을 어찌 걸어왔을까?

한순간 세계가 무너져버린 거짓 없이 측은한 저 여인에게 어떤 기억이 아직도 신념처럼 남아 있는 것일까?

병삼은 다시 돌아가 그 여인을 안고 오랫동안 가만히 있고 싶었다.

그때 아무도 안아주지 못했던 열일곱 살 작은 소녀를, 마르고 따스한 머리칼을, 서럽고 아프던 눈물을.

돌아누운 산천에서 냇물은 어디로 흘러야 하는가.

누렇게 곪은 들판에선 무엇이 자랄 것인가.

푸서리 땅에는 잡풀만 거친데, 새들은 어느 가지에 앉아 울어야 하는가.

김계희(그림책 작가)

◇한국 집창촌의 유래

일제 식민지 수탈 막다른 조선의 딸들 처절한 눈물이 서린 곳

오늘날 한국의 집창촌은 일본식 유곽(遊廓)에서 시작되었다. 유곽은 강화도조약 체결 후 부산항, 원산항, 인천항의 일본인 집단 거류지에서부터 형성되었다. 일본의 남성 노동자들이 조선으로 이주하면서 성매매를 위한 집창촌을 만들기 시작했고, 몸을 파는 일본 여성들이 후에 들어왔지만, 몸값이 두 배나 싸다는 이유로 후에는 조선 여성의 종사자가 늘어났다.

자갈마당이라 불리는 대구의 집창촌은 대구의 윤락가를 대표하는 곳이다. 그 일대에 자갈이 많다 하여 자갈마당이라 불린 이곳은 일본 거류민단에 의해 대구 성이 철거되면서 나온 돌들로 도원동 습지를 메워 집창촌 부지를 만들었고, 1908년 야에가키초 유곽에서 출발하여 1916년경 다무라가 인수하면서 번성하기 시작한다.

1908년 일제는 의회에서 동양척식회사법을 통과시키고 조선의 농토를 약탈하기 시작한다. 약탈한 토지를 조선 농민에게 빌려주어 과중한 소작료를 징수하면서 조선 농민들의 굶주림은 극에 달한다. 또한 일본 농민의 조선 이주정책으로 말미암아 조선 농토에는 과잉 인구가 생겨나고, 일제는 조선인 농민들을 미개척 땅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편다.

이에 농사를 짓고 살던 남자들은 착취에 견디다 못해 터전에서 쫓겨나와 지옥과 같은 유랑 생활을 하는 한편, 막다른 지경에 몰린 여자들은 성(性)을 생계수단으로 삼아야 하는 시절을 맞는다. 먹고살기 위해 딸을 유곽으로 팔아야 했거나, 한술이라도 입을 덜기 위해 스스로 유곽을 찾아야 했던 시대의 비극이었다. 대구 읍성의 흙과 돌이 식민지 수탈의 발판이 되고, 조선의 농민과 딸들의 눈물이 서려 있는 이곳은 일제 식민지 수탈정책으로 얼룩진 슬픈 역사의 얼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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