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의 혼] 제1부-나라사랑 12)'독도수호' 안용복 장군과 홍순칠 대장

입력 2011-04-01 07:21:46

두 선각자가 온몸으로 지켜낸 '韓國領'…독도는 결코 외롭지 않다

일본은 지금 사상 최대의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와 방사능 피해를 당해 국토가 유린된 상태다. 그래서 외국으로부터 온정의 손길이 쏟아진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의 지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일부 인사들은 '이 정도면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을까 싶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이는 일본을 잘 모르는 데서 오는 섣부른 기대다. 우리의 총력적 지원 와중에 일본이 다시 '독도영유권 강화 주장'을 담은 교과서를 펴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루스 베네딕트가 정의한 '국화와 칼'의 일본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된다. 국화(평화)를 사랑하면서도 칼(전쟁)을 숭배하는 모순이 그들의 본질이다.

독도는 우리 국토의 막내둥이. 절대 일본에게 뺏길 수 없는 살점이다. 이런 독도를 지켜낸 주역이 있으니 바로 안용복 장군과 홍순칠 대장이다.

◇안용복 장군

◆출생 및 신분

출생에 대한 정확한 내용은 현재 거의 없다. 단지 사료를 통해 추측하는 정도. 일본 돗토리현의 18세기 역사가 오카지마의 '죽도고'에 따라 1차 도일 때(1693년, 숙종 19년) 36세로 추정된다. 이 기록도 정확치 않다는 것이 중론.

그는 순흥 안씨로 알려져 있다. 순흥 안씨 후손들은 지금도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하지만 당시 천민신분이라고 기록된 흔적들도 있어 그의 일대기는 현재 사학자들이 연구 중이다. 조선시대의 상황상 천민 출신이 울릉도를 지키기 위해 일본을 드나들 수는 없어 적어도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는 중인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활동

안용복 장군은 장군이 아니라 조선 수병이었다. 일개 사병의 몸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왜구의 침탈 시도에서 막아낸 영웅. 광복 후 1954년 부산의 애국단체인 대동문교회가 '독전왕(獨戰王) 안용복 장군'으로 추존식을 거행한 것을 계기로 장군으로 불리게 됐다.

동래 수군으로 복무하면서 왜관에 자주 출입하여 일본 말을 잘하였던 그는 1693년 울릉도에서 고기잡이 하던 중 이곳을 침입한 일본 어민을 힐책하다가 일본으로 잡혀갔다.

여기에서 안용복은 울릉'독도가 조선의 지계(地界)임을 들어 납치와 구금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항거했다.

이후 안용복은 울릉도에서 일본 어선들의 불법 조업이 끊이지 않자 2차 도일을 감행했다. 안용복은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島監稅官)이라 자칭하고 일본 호키주에 가서 태수에게 일본 어부들이 울릉'독도를 침범한 사실을 항의하고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그러나 나라의 허락 없이 국제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안용복은 조정에 압송돼 사형까지 거론되다 겨우 귀양에 처해졌다.

이듬해인 1697년 대마도주는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하고 울릉'독도를 조선땅으로 확인한다는 막부의 통지를 보냈으나 안용복의 죄는 풀리지 않았다.

그의 활약으로 철종시대까지는 울릉'독도에 대한 분쟁은 없었다고 하니 일개 어부였던 안용복의 열할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능하다.

◆평가

조선 영조 때 대학자 성호 이익은 저서 성호사설에서 "안용복은 참 영웅이다. 한 천한 군졸이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를 위해 강한 적과 싸워 나라를 지켰건만, 조정은 큰 상을 주지 않고 도리어 죄를 주어 귀양을 보냈으니 참으로 애달픈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한탄했다.

정조 때 대제학을 지냈던 윤행임은 "조정에서 울릉도를 일본에 내주자고까지 한 것을 일개 수병이 저의 책임도 아니고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죽음을 다해 울릉도를 뺏기지 않았으니 공이 얼마나 장한가"라고 했다.

정조 때 편찬된 한국 역사 분류사인 '증보문헌비고'에는 '왜국이 울릉도의 섬들을 자기네 땅이라고 두 번 다시 말하지 않게 된 것은 오로지 안용복의 공이다'라고 기록했다.

◇홍순칠 대장

6'25 직후 한국의 혼란기를 틈타 일본이 독도에 대한 야욕을 드러낼 때 아무런 대가도 없이 독도수호에만 전념한 수비대 33인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독도를 안고 갈 수 있다. 그 중심에 홍순칠 대장이 있다.

◆무기 확보

할아버지(홍재현)가 울릉도에 터를 잡은 이후 1929년 1월 23일 울릉에서 태어난 그는 6'25전쟁에 참전했다. 전쟁 중 부상을 당해 제대 후 고향에 머물며 고기잡이를 했는데 울릉군수 및 서장으로부터 일본의 잦은 독도 침범 사실을 전해듣고 독도의용수비대 결성을 마음먹는다. 독도 사랑이 남달랐던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돈과 오징어 판 돈으로 부산에서 무기를 구입했다. 전적으로 그의 노력에 힘입어 의용수비대가 무장할 경기관총 2정, M2 3정, M1 10정, 권총 2정, 수류탄 50발의 무기가 확보됐다. 6'25 자원참전 용사 중에서 뜻을 같이하는 대원들이 속속 합류했다.

◆독도 사수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한 1953년 4월 20일에 홍 대장과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에 도착, 본격적인 수호에 들어갔다. 그 해 6월 독도로 접근하는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을 귀향 조치했고, 7월에는 독도 해상에 나타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과 총격전을 벌여 격퇴했다. 그는 무기 보강이 절실함을 깨닫고 독도에서 난 수산물 등을 뭍으로 가지고 나가 판 돈으로 박격포를 구입했다.

수비대는 독도 상주 4개월 만인 8월 5일 역사적인 거사를 감행했다. 동도 바위 벽에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당당히 밝히는 '한국령'(韓國領)을 새겨넣은 것. 이 글귀는 아직도 독도를 찾는 이들의 가슴을 뛰게 한다.

◆날 선 일본

1954년 11월 21일에는 1천t급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함 PS9, PS10, PS16함이 비행기 1대와 함께 독도를 포위하듯이 접근하자 독도의용수비대와 경찰 경비대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결국 일본은 16명의 사상자를 안은 채 퇴각했다. 이로 인해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항의 각서를 보내고 독도우표가 첨부된 우편물을 한국으로 반송시켰으며, 일본 해상보안청의 함정이 매달 정기적으로 출현해 긴장감을 높여갔다.

◆명예로운 인계

1956년 12월 30일 홍 대장과 마지막까지 남은 독도의용수비대 32명은 무기와 독도 수비임무를 경찰에 인계하고 3년 8개월 만에 울릉도로 돌아갔다. 이 공로로 홍 대장은 1966년 5등 근무공로훈장, 나머지 대원들은 방위포장을 받았다. 이후에도 독도 사랑 운동에 열중한 그는 독도 인근 해상에서 10년 동안 탐수 작업을 벌여 1966년 9월 식수를 발견, 수조 탱크를 설치하고 독도 근해에 출어하는 어민들이 이용하도록 하였다. 1983년 6월에 독도 정상에 대형 태극기를 설치하는 등 1986년 57세로 사망할 때까지 독도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1996년 홍 대장에게는 보국훈장 삼일장이 추서됐다.

최정암기자 jeongam@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