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촌유학' 예천 용문초교생 행복한 봄맞이

입력 2011-03-29 07:45:02

도시 아이들, 청산에 살어리랏다

'산촌유학'이 뜨고 있다. 도시 아이들에게 시골의 정취와 자연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는 것. 이 아이들이 머무는 덕분에 시골에도 생기가 돈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뛰놀고 시골의 일상을 체험하며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도심에 봄 기운이 완연하다. 하지만 팍팍한 일상 속 도시민들은 좀체 봄을 만끽하지 못한다. 봄 향기에 젖어들기에는 몸과 마음에 여유가 없다. 회색빛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도 마찬가지. 요즘 아이들은 부모보다 더 바쁘다. 학교 문을 나서면 학원 순례하기 바쁘다. 주말도 예외가 아니다. 부모들은 아이가 안쓰럽지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가운데 '산촌(山村) 유학'에 눈길을 돌린 학부모'학생들이 있다. 산촌 유학은 도시 아이들이 일정 기간 동안 시골에서 학교를 다니며 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자는 프로그램이다. 농촌의 아이들과 함께 뛰놀며 공부하는 모습에서 행복한 교육이란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용문 농촌 유학 시골살이 아이들'을 통해 산촌 유학생활을 들여다봤다.

◆도시 아이들의 유쾌, 상쾌한 시골살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달 22일 찾은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의 금당실 마을. 점심을 먹고 난 용문초등학교 아이들이 운동장 한쪽 우거진 소나무 숲에서 술래잡기 놀이에 한창이었다. 까르르 넘어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솔 숲을 메아리친다. 이 숲은 오미봉에서부터 용문초교까지 소나무가 800여m 늘어선 '예천 금당실 송림'(醴泉 金塘室 松林)으로 천연기념물 제469호. 용문초교 아이들에겐 놀이터이자 그늘을 만들어주는 휴식처,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는 체험장이다.

학년당 1학급인 용문초교는 전형적인 시골 소규모 학교. 전교생이 모두 61명이다. 겉모습은 여느 시골 초교와 다를 바 없지만 이곳에는 현재 도시 아이들 14명이 '산촌 유학' 중이다.

서울'경기 등 수도권 11명과 대구 3명으로, 6학년 3명을 비롯해 학년도 다양하다. 산촌 유학으로 이곳에 머무는 기간은 최소 한 학기. 하지만 작년에 먼저 온 3명은 2년차 유학을 하고 있다. 이달 초 새로 전학 온 11명은 먼저 온 아이들로부터 산촌 유학의 경험을 배우고 있다.

도시 아이들 14명은 학교 인근의 농가 5곳에서 나뉘어 살고 있다. 시골 아이들에게 유학생들은 전학 온 친구이자 형, 누나, 언니, 동생이다. 겉모습만 봐선 도시 유학생과 시골 아이들이 구분이 가지 않는다.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유학생들의 학교생활은 시골 아이들과 똑같다. 도시 못잖게 잘 갖춰진 특성화 교실에서 영어와 독서 활동, 악기 연주, 그림 그리기 등 다양한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을 함께한다. 하지만 오후 4시 무렵 학교 문을 나서면 메주나 된장 만들기, 자연 염색과 손바느질, 텃밭 가꾸기 등 체험학습이 도시 아이들을 기다린다. 휴일에는 마을 주변 유적이나 도서관에 들르고 장날이면 시골 장보기도 한다.

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 숙제와 일정량의 공부를 마쳐야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다. 휴대전화와 TV, 컴퓨터가 없는 까닭에 아이들에겐 좋아하는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동기부여가 된다. 하루 일을 정리해보는 일기 쓰기와 명상도 빼놓을 수 없다.

이날도 유학생들은 자신들이 묵고 있는 농가 대신 짚으로 지붕을 이은 집으로 몰려갔다. '소나무 아저씨' '시냇물 아줌마'라 불리는 송난수(60)'이현숙(49) 씨 부부가 '산촌 유학' 아이들을 위해 마련한 공동체 공간이다. 이 씨가 간식으로 챙겨준 옥수수죽을 먹은 아이들은 호미와 장화를 챙긴 뒤 다시 길을 나섰다. 송 씨 부부의 집 뒤편 텃밭에서 달래를 캘 참이다.

한 줄로 늘어서 걷는데 이 씨와 함께 맨 뒤에 선 최유담(6학년) 양이 맏언니 노릇을 톡톡히 한다. "호미 갖고 장난치면 안 돼. 잘못 하면 다쳐. 너 뭐하니? 얼른 줄 맞춰 가자." 어리게만 보였는데 동생들 앞에선 제법 어른스럽다. 서울 출신인 유담이는 지난해 이곳으로 유학을 왔다. 송 씨 부부가 방학 때면 여는 시골살이 맛보기 캠프에 참가했다가 마음을 굳혔다. 유담이 부모는 맞벌이를 하고 있어서 가끔 이곳에 들르는 정도. 대신 유담이가 2주에 한 번 서울 집에 들른다. 시골 생활에 재미를 들여 이곳에서 졸업을 할 작정이다.

"예전엔 학원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여기선 마음이 편해요. 혼자 자라 부끄럼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지만 지금은 자신감이 많이 붙었고요. 무엇보다 동생들이 생겨 좋아요."

◆상생(相生)의 길, 산촌 유학

'산촌 유학'이 도시 아이들에게만 뜻깊은 경험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도시에서 유학 온 아이들 덕분에 학교와 마을도 활력을 되찾고 있다.

1922년 개교한 용문초교는 그동안 8천여 졸업생을 배출했으나 올해 졸업장을 받은 학생은 4명뿐이다. 최근 입학생 수가 눈에 띄게 줄면서 한 학급에서 2개 학년이 공부하는 복식수업까지 고려해야 할 뻔했지만 도시에서 온 유학생들 덕분에 활로를 찾았다. 노인들이 대부분인 마을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더 늘었다.

용문초교는 사물놀이 등 다양한 방과후학교 활동으로 아이들 사이에 벽을 허물고 공동체 의식이 커지도록 돕고 있다. 이곳 이재일 교장은 "산촌 유학생들이 머물게 되면서 시골 아이들도 교류의 폭이 넓어지고 생각 역시 깊어졌다"며 "이 같은 프로그램이 더 활성화되면 아이들 인성교육뿐 아니라 도시민들에게 농촌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학 생활에 대한 학부모들의 만족도도 높다. 2년차 유학생 노해담(6학년) 양은 경기도 수원의 한 아파트에서 살다 지난해 이곳으로 왔다. 해담이는 시골 생활이 아주 마음에 들어 내년에 용문중학교에 진학할 생각이다. 앞으로의 진로를 생각하면 불안하지 않을까? "공부는 결국 아이 본인이 하는 거잖아요. 학원만 가지 않을 뿐 수업 내용은 대도시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오히려 선생님이 더 알뜰히 챙겨주시는 장점도 있고요."

해담이 어머니 이원희(41) 씨는 지난달 아들 나로(1학년)까지 데리고 와 아예 용문면에 터를 잡았다고 했다. 간호사 시절 아픈 아이들을 보면서 공부보다 더 소중한 게 몸과 마음의 건강이라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다. 남편과는 주말 부부 신세가 돼버렸지만 밝아진 아이 얼굴을 보면 뿌듯하다. 시골 살이의 정도 새록새록 느낀다. "열려 있는 대문으로 어르신들이 무작정 들어오십니다. 처음엔 살짝 당황했지만 그게 다 정을 내려고 하시는 행동이었어요. 원래 알던 사람 대하듯 말을 건네시고 나물을 안겨주곤 하시더군요. 이젠 그런 방문이 오히려 반갑죠."

김미조(39'여) 씨는 서울 생활을 접고 딸 현예나(5학년) 양과 함께 지난달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도서관에서 산촌 유학에 관한 책을 본 뒤 결심한 일이다. "조용하던 예나가 의욕이 넘치는 아이로 변한 걸 보면 잘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1'2학년 동생들에게 아침마다 영어 동화책 읽어주기 봉사를 하는 모습에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길러진 것 같아요."

시골 생활이 낯선 도시민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이들은 시골 아이들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도시에서 온 친구들과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어울린다. 덕분에 도시 아이들은 따뜻한 추억을 안고 간다.

유채림'정효민(이상 6학년) 양은 "이곳 생활을 잊지 못한 아이들 중에 가끔 다시 들르는 경우가 있다"며 "새로 전학 온 아이들도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도록 옆에서 도와주겠다"고 다짐했다. 김가희(6학년)'현고은(5학년) 양은 "도시로 돌아간 아이들 중 몇몇과는 꾸준히 휴대폰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는다"며 "다들 여기 생활이 너무 재미있었다고들 한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