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추진, 세계 3대 규모…대형 라이선스 중심, 창작물 취약
몇 년 전 요코하마에 있는 시키(四季)예술센터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시키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의 안내로 예술센터 내부를 둘러보면서 그 규모와 시설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시키예술센터는 시키 배우들을 위한 전문 트레이닝센터로 대형 연습실 6개를 비롯해서 20여 개의 개인 연습실과 무대세트, 의상을 만드는 제작소까지 구비된 복합시설로 우리 돈으로 600억원을 투자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배우들은 체계적인 훈련과정을 거쳐 전국의 무대에 오르게 되는데 한국인 단원도 상당수 여기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시키극단에는 1천200여 명의 배우와 스태프들이 월급제 혹은 연봉제로 일하고 있는데 배우들은 안정된 수입이 보장된 가운데 공연에만 전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일본의 뮤지컬 시장은 어느 정도 규모일까? 일본은 미국 브로드웨이, 영국 웨스트엔드에 이어 세계 3대 뮤지컬 시장의 하나로 규모면에서 단연 아시아 최고의 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대략 연간 매출 5천억원 규모로 추정되는 가운데 시키극단이 전체 매출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일본 뮤지컬 시장을 이야기할 때 시키극단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1953년 순수연극단체로 출발한 시키는 역세권을 중심으로 전국에 11개의 전용극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해마다 3천여 회의 공연을 올리고 있다. '위키드' '라이언 킹' '오페라의 유령' 등 대작 라이선스 공연을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에 걸쳐 공연하고 있는데 객석 점유율 80%대를 유지하고 있다니 부러울 따름이다.
현재의 시키극단을 이끈 인물은 시키의 창립자이자 최대 주주이기도 한 아사리 게이타 회장이다.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연출가이자 탁월한 프로듀서, 그리고 사업가로 일본 뮤지컬 산업의 부흥을 이끈 장본인이다. 지역 네트워크가 가능한 언론 매체와 자본력이 우수한 기업을 끌어들이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전국적인 극장 인프라를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장기공연이 가능한 시스템을 정착시켰다. 또한 고객제일주의와 회원제 활성화를 통해 저변을 확대시키며 일본의 뮤지컬을 산업화의 길로 이끌었다. 나카소네 전 총리,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 신격호 전 롯데 회장과의 각별한 친분은 잘 알려져 있다.
규모면에서 한국과 비교가 되지 않지만 일본 뮤지컬계에도 아킬레스건은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 중심으로 시장을 키워오다 보니 창작 뮤지컬 제작 능력이 취약하다는 것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극단 시키조차도 이렇다 할 창작 뮤지컬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꿈에서 깬 굼'(1987, 어린이 뮤지컬로 초연 후 성인용으로 다시 제작) '이향란'(1991)' 등의 자체 창작 뮤지컬을 제작하였지만 흥행과 작품성에 있어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일본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토호극단도 소극장용 창작 뮤지컬에 눈을 돌리고 있지만 아직 성공작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오히려 '사랑은 비를 타고'나 '달고나' 등 한국의 소극장 창작 뮤지컬을 라이선스로 공연하고 있는 실정이다. 창작 뮤지컬 제작에 있어서는 '명성황후' '난타' 등의 대표작을 가지고 있는 한국이 좀 더 앞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서는 창작 뮤지컬뿐 아니라 '지킬앤하이드' '맨오브라만차' 등 한국에서 제작된 라이선스 뮤지컬을 일본에 역수출하는 등 한국 뮤지컬의 일본 진출 가능성도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한국에 비해 일찍 산업화의 길을 걸어온 일본은 내수시장 규모나 각종 인프라, 체계적인 제작 시스템 등에서 한국에 비해 훨씬 성숙한 시장임에 틀림없다. 라이선스 뮤지컬의 한계와 창작 뮤지컬의 개발이라는 현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와 마찬가지이다. 시키 극단의 사례를 그대로 한국 뮤지컬 시장에 접목시킬 수는 없겠지만 일본 뮤지컬 시장의 성장과정에서 배울 것은 배우고 개선할 것을 개선해서 시행착오를 줄여나간다면 일본 뮤지컬 시장은 한국 뮤지컬의 새로운 활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준비하던 중에 일본의 대지진 소식을 접했다. 하루빨리 일본 사회가 안정을 되찾기를 기원한다.
최원준 ㈜파워포엠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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