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고증자료 잇따라 발굴…아들 박정용씨 기사 등 本紙에 제공
애국지사 고(故) 박희광(1901∼1970) 선생의 항일독립운동 활동사항을 고증할 수 있는 희귀 자료들이 잇따라 밝혀지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 자료들은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기념사업회가 대구한의대 남상권(국문학과) 교수의 도움으로 독립신문에 게재된 기사와 관동청 지방법원 판결기록문, 조선총독부 등에 보관됐던 자료 10여 건을 매일신문사로 보내온 것이다.
독립신문 1924년 7월 26일자에 '삼장사(三壯士)의 용감(勇敢)'이란 제목으로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김광추(金光秋) 김병헌(金炳憲) 박상만(朴相萬·박희광 별명) 삼장사(三壯士)가 백주(白晝)에 용감(勇敢)히 봉천신시가정정(奉天新市街錠町) 즉 왜경찰서접근(倭警察署接近)에 은복(隱伏)한 전 보민회괴수(保民會魁首) 최창규(崔晶奎)의 가족을 토벌(討伐)했다'는 등 항일독립운동 일대기를 기록했다.
특히 남상권 교수가 보내온 자료 중 관동청경무국(關東廳警務局)이 1924년 6월 30일 일본외무성 아세아국장(亞細亞局長)에게 발송한 '불령선인(不逞鮮人) 친일선인(親日鮮人)에게 위협문(威脅文)' 이란 자료에는 의용군(義勇軍) 관련 내용 등이 자세하게 기록돼 무장독립운동단체의 명분이 뚜렷이 나타나 항일정신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박희광 선생은 구미 봉곡동에서 태어나 8세 때 부친을 따라 만주로 이주한 뒤 18세 때 만주 서간도 지역 민족주의자들이 결성한 무장독립운동단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오동진(吳東鎭) 선생 휘하에 입대해 김광추, 김병헌 등과 임시정부 3인조 암살특공대원으로 맹활약을 했다.
박 선생은 1924년 6월 여순경찰서 고등계 첩자로 악명이 높았던 정갑주를 총살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7월 일본 요정 금정관에 침입해 군자금 300원을 탈취해 나오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후 중국 뤼순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감형돼 1943년 출옥했으며, 1968년 3월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았다. 박 선생은 감옥에서 익힌 재봉기술로 양복수선업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다 1970년 향년 71세로 타계했다.
박희광 선생 기념사업을 추진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2년 동상 건립비 100만원과 '애국지사박희광선생지상'(愛國志士朴喜光先生之像)이라는 친필 휘호를 내렸다
박 선생의 동상은 1984년 8월 15일 도립공원 금오산 경북도자연환경연수원 입구에 기단 275㎝, 동상 270㎝ 크기로 건립됐다.
박 선생의 둘째 아들로 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박정용 씨는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의 구국항쟁 정신과 나라사랑 역사의식을 학생들에게 제대로 알려 독립정신을 계승해 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구미·전병용기자 yong12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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