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필자가 강의하고 있는 대학교 학과 사무실에서 본 장면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한 학부모가 신입생 자녀의 수강 시간표를 작성해 주기 위해 조교와 상담 중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필자는 상담이 끝난 후 조교에게 물었다. "학생은 어디 가고 왜 어머니가 대신 수강 신청을 합니까?" 학생 대신 어머니가 자녀의 수강 신청과 부전공 문제, 진로 상담을 위해 직접 학교에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조교의 말에 필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학생이 된 자녀의 수강 신청에서조차 부모가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현실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어처구니없는 이러한 일은 자녀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 부모는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선택하고 결정한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사는 곳 심지어 친구 관계, 연애, 진로 문제 나아가 결혼이라는 중대한 선택에 있어서도 부모의 뜻을 강요한다. 그러면서 정작 부모들은 모든 것이 자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녀들은 부모의 선택과 결정이 정답이며, 자신이 가야 하는 길임을 어려서부터 학습하며 자란다. '내 안의 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 안의 나'를 위해 행동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유아 교육 현장에서 오랜 기간 아이들과 함께한 필자는 3월 신학기가 되면 이런 현상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다. 이를 염려하며 신학기 오리엔테이션에서 늘 학부모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한석봉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한석봉은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가난하여 종이를 살 수가 없는 형편에서도 항아리 표면과 가랑잎에 글씨를 쓰면서 학업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는 촛불이 꺼진 방에서 어머니는 떡을 썰고 석봉은 글씨를 쓰는 장면인데 이러한 일화 뒤에 숨겨진 여러 가지 교훈적 해석이 있지만 그 중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석봉 어머니의 양육 태도이다. 아들이 스스로 자신의 환경과 능력을 평가하고 그 평가에 따라 주도적으로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자기 주도력을 강조하는 독립 교육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첫출발을 하는 신입생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다. 부모들은 이러한 환경에서 내 아이가 용기 있게 대처하며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보다 무조건 다른 아이들보다 앞서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해야 할 행동과 선택 사항을 미리 알려주며 부모가 제공한 표준에 따를 것을 생의 초기부터 교육하는데 이러한 부모의 양육 태도는 자녀가 성장하면서 매우 강력한 긍정적,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녀의 자기 통제력, 자기 주도력은 부모의 자율적(민주적), 통제적(지배적), 상호 보완적 양육 태도가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잘 설명해 주는 이야기가 있다.
얼마 전 TV 다큐멘터리에서 시력을 잃은 딸을 둔 부모의 이야기가 다루어졌다. 시각 장애아를 둔 부모는 아이에게 필요한 교육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에는 매우 가슴 아픈 현실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칠흑 같은 암흑 속 현실에 첫걸음을 내딛는 것은 두 눈을 가진 자에게도 두렵다. 그러나 매번 도와주고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부모는 앞을 보지 못하는 딸에게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를 건너는 심부름을 보낸다. 바로 독립 교육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독립, 자기 주도적 행동의 시작이라는 위험한 길을 떠나보내지만 자식 사랑으로, 묵묵히 눈물을 삼키며 딸의 뒤를 조용히 따라가는 부모의 모습을 보며 울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보지 못하는 딸이 넘어지더라도 앞으로 살아갈 세상의 떳떳한, 주도적인 구성원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양육 태도는 이 시대의 부모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직까지 자녀는 현재 진행형, 공사 중에 있다. 앞으로의 공사 일정에 대한 선택권은 현장 담당자인 부모에게 있다. 콘크리트가 굳지도 않은 1층에 2층을 올린다면 얼마 가지 않아 건물이 붕괴되고 마는 무서운 결과가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기다리고 인내하며 바라보자. 우리의 자녀가 진정으로 독립하는 그날을 위하여!
정한철(한국헤티연구소장'유아 교육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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