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낙동강시대] (28)문경 봉생마을<2>

입력 2011-01-26 07:51:46

인민군들의 군홧발은 이 작은 마을까지 짓밟고…

하늘에서 내려다본 눈덮인 봉생마을. 영강과 지류 조령천이 합쳐져 독산을 U자형으로 감싸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하늘에서 내려다본 눈덮인 봉생마을. 영강과 지류 조령천이 합쳐져 독산을 U자형으로 감싸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태조 왕건이 새 왕조 고려를 세우기 위해 세력을 규합하던 중 고모산성 남쪽에서 토끼가 도망가던 벼랑길을 발견했다는
태조 왕건이 새 왕조 고려를 세우기 위해 세력을 규합하던 중 고모산성 남쪽에서 토끼가 도망가던 벼랑길을 발견했다는 '토끼비리'.
6·25 당시 인민군 장교들이 타고 왔던 말에서 나온 말발굽. 김윤순 할머니가 집앞 나무에 보관하고 있다.
6·25 당시 인민군 장교들이 타고 왔던 말에서 나온 말발굽. 김윤순 할머니가 집앞 나무에 보관하고 있다.
1970년대부터 수차례 우여곡절을 겪었던 봉생교,
1970년대부터 수차례 우여곡절을 겪었던 봉생교,

영강의 지류, 조령천이 본류를 만나 활 모양으로 휘어지면서 바닥은 깊게 파인다. 그 납작소는 봉생 아이들의 물놀이장이 되고, 소(沼)는 다시 물길을 모아 낙동강으로 흘려보낸다.

신라가 백제와 대가야를 견제하기 위해 세운 고모산성은 어룡산을 마주하며 낙동강으로 향하는 영강 물길을 내려다본다.

태조 왕건은 10세기 전반 새 통일국가를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세력을 규합했다. 왕건은 어느 날 남쪽으로 치고 내려오다 고모산성 앞쪽 벼랑에 이르러 길이 막히자 멈칫했다. 하지만 그 순간 벼랑을 타고 달아나는 토끼를 포착했고, 도망가는 토끼를 따라 길을 냈다. 바로 '토끼비리'(토천:兎遷)다. 토끼비리 남쪽에는 문경탄광의 옛 흔적과 하늘로 치솟은 돌과 절벽이 빚어낸 진남교반이 3번 국도를 지나는 이들의 눈과 발을 그러모은다.

문경시 마성면 신현3리 봉생(鳳笙). 봉생마을은 고모산과 어룡산이 마주하고, 대각선으로 곤두산과 탑산이 영강 건너 독산을 마주하고 있는 그 중심에 둥지를 틀고 있다. 470년대 신라의 요새, 927년 고려 왕건의 자취, 16세기 말 서애 류성룡의 향이 이어져 1천500여 년을 품은 마을이다. 주민들의 땀과 눈물이 밴 봉생교, 숨진 인민군들이 탔던 말의 말발굽을 비롯해 6·25의 상흔을 간직한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 진입도로와 봉생교

영강이 지류인 조령천과 합쳐지는 지점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다리 '봉생교'.

이 다리는 2차례나 허물고 다시 짓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주민들의 땀과 눈물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1970년대 이전까지 주민과 학생들은 마을을 벗어나 시장이나 탄광, 학교에 가기 위해 산기슭을 돌고 돌아야 했다. 당시 주민들의 최대 숙원은 마을 진입다리 건설이었다.

73년 처음 만든 다리는 강철로 꼰 와이어와 나무를 엮어 만든 '출렁다리'였다. 이동영 봉명탄광 사장이 자비를 들여 다리를 놓아주었다고 한다. 봉생 마을에는 북쪽 봉명산 소야천변 봉명탄광에 다니는 주민들이 10여 명 있었는데, 이들이 광업소에 출퇴근하는데 크게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출렁다리는 노인이나 아이들이 다니기에는 불안하고 위험했다. 결국 2년 만에 뜯어낼 수밖에 없었다.

영강 건넛마을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제대로 된 다리가 필요했다. 주민들은 당시 문경군청에 수차례 민원을 제기했지만 40가구에 불과한 마을을 위해 쉽사리 다리를 놓기 어렵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75년 주민들의 끈질긴 요구 끝에 군수는 결국 "마을에 차가 다닐 수 있도록 도로를 넓히고 닦으면 다리를 놓아 주겠다"고 조건을 붙였다.

권영하(79) 씨는 다리 건설 과정을 설명했다.

"장마만 지면 이 동네가 꼼짝을 못하는 기라. 물이 많으면 학생들이 산으로 돌아가서, 가은으로 가는 길로 한참 돌아나갔지. 우리 숙원이 다리인 기라. 그때 군수가 지금 마을회관 마당까지 차가 댕기도록 새마을사업을 해놓으면 다리를 놔 주겠다 약속을 한 거라."

주민들은 힘을 모았다. 하지만 리어카 하나 다니기 어려운 좁은 도로를 차가 다닐 정도로 넓히기는 쉽지 않았다. 군 복무 중인 아들부터 객지에 나간 처녀, 총각들까지 고향에 오면 마을 도로공사에 불려갔다. 그야말로 마을에서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투입된 셈이다.

레미콘이 없던 시절, 시멘트를 구해 삽으로 강가에서 모래와 섞은 뒤 다시 지게에 지고 공사 현장으로 옮겼던 것.

권영하 씨는 작은 마을에서 하루 최대 120명까지 공사에 동원했고, 당시 사용했던 시멘트도 1천770포대였다고 했다.

꼬박 두 달 동안 이뤄진 이 도로 확장·포장 공사는 마을 전 주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완성했다. 결국 봉생 주민들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봉생교 교각 4개를 확보하는 성과를 냈고, 다음 군수 시절 다리를 완성했다. 이 다리는 20여 년 사용되다, 4차로 도로확장 공사를 벌이면서 현재의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됐다.

◆6·25의 상흔

봉생에는 6·25의 흔적도 뚜렷이 남아 있다. 당시 인민군들은 봉생마을에 장기 주둔하지는 않았지만 잠시 진을 친 뒤 지나갔다. 마을 북쪽 곤두산에서는 아군과 인민군들 간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곤두산에서의 전투는 마을에까지 영향을 미쳐 포탄으로 상당수 집들이 잿더미가 되었고, 40여 가구 중 10여 가구만 온전히 남았다고 주민들은 말했다.

봉생마을의 전쟁은 인민군이 곤두산 넘어 조령으로 후퇴하다 다시 점촌에서 반격하면서 시작됐다. 곤두산과 조령 사이에 벌어진 전투는 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6개월 이상 계속됐다.

봉생에 들어온 인민군들은 '치안대'를 만들어 몇몇 사람들에게 권한을 부여한 뒤 주민들을 이끌어 부역을 시켰다. 이들은 폭격기 공습을 피해 탄약이나 식량 등을 나르는 등 어쩔 수 없이 인민군을 도와야 했다.

박도상(87) 씨가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인민군들이 지나는 길에 잠깐 들렀던 거지. 여기 사람들은 내빼고. 그때 젊은 사람도 있고, 여자도 있고, 열댓살 먹은 애가 총을 메고 나온 것도 있었어. 그 사람들 말로는 해방됐다고 하더구먼. 그네들이 정치공작하고 별거 다하고, 땅 분배한다고 뺏어서 줘버리고 했지."

박 씨는 말을 이었다.

"부역 간다고 (영강에서) 낙동강까지 내려갔잖아. 노역을 했지.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갔는데, 인민군한테 협력했다고 곤란을 겪었지. 나도 그때 (인민군) 잔심부름을 했는데, 부역자라고 주목을 많이 받았어."

박 씨는 당시 알고 지내던 경찰이 '구설에서 벗어나려면 공직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지방 말단 공무원으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권영하 씨도 "(인민군이) 곤두산하고, 조령 너머로 후퇴를 다 했는데, 새로 전쟁을 해가지고 점촌에서 반격을 해왔어. 인민군들은 밤으로 행군을 했거든. 낮에는 비행기 때문에 못 다니고. 장교들은 말타고…"라고 했다.

당시 떨어진 포탄으로 독산 앞 진남숲 '새정자'도 불탔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곤두산 곳곳에는 숨진 인민군들의 뼈, 장교들이 타고 온 말과 장화, 그들이 파놓은 호 등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김윤순(86) 씨는 인민군들이 타고 온 말의 말발굽을 곤두산에서 주웠는데,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봉생마을 남쪽 문경시 유공동에서는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이 경찰에 살해된 사건도 일어났다고 한다. 해방 전후 좌익 활동을 하는 등 좌파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전향시킨다는 명목으로 1949년 이승만 정권이 전국적으로 조직한 (국민)보도연맹. 군과 경찰은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30만 명이 넘는 가입자들 중 상당수를 찾아내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뒤 매장했다.

박동수(67) 씨는 "시청 덜 가서 유곡동이라고 있어. 그때 저녁 때 보도연맹이라고, 과거에 사장된 사람들을 갖다 놓고 총으로 막 갈겼대요. 그래서 죽었어. 봉생에도 좌익했던 두 사람이 군인들 총에 맞아 죽었지"라고 말했다.

전쟁 중 의용군으로 끌려간 이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대다수 돌아오지 않았는데, 봉생 일부 주민들도 있었다고 한다.

박동수 씨는 당시 의용군으로 갔던 형을 2007년 대한적십자사 주선으로 '화상'을 통해서라도 만날 수 있었다.

박 씨는 "형님이 그때 열일곱에 갔기 때문에 나이가 제일 어렸어. 죽은 줄 알고 제사까지 지냈는데, 살아 있더라고. 3년 전 연락이 와서 화상 상봉했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봉생 노인들에게 6·25전쟁의 아픈 기억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김수정·이가영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권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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