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고향의 맛] 눈길위의 라면 한 그릇

입력 2011-01-20 14:11:01

도반들의 여행 계획은 아주 즉흥적이다. 기획하고 상의하는 과정은 생략한다. 점심을 먹다가도 "내일 새벽 됐나"하고 운을 떼면 "됐다"는 동조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면 바로 출발이다.

정오 뉴스에 "내일 아침 기온은 올 들어 가장 추운 영하 20℃"라는 아나운스먼트가 떨어지기 바쁘게 "새벽 기차를 타고 봉화 석포로 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여럿 중에서 두 사람만 출발키로 했다.

눈길 여행에 등산장비 단단히 챙기고…

석포역에서 승부역으로 가는 눈길은 정확하게 12km이다. 재바르게 걸으면 네 시간 안에 다다를 수 있지만 빨리 걸어봐야 하행열차를 탈 때까지 남은 시간을 죽일 방법이 없다. 동대구역에서 새벽 6시 20분에 강릉행 열차를 타고 석포역에 내리면 오전 10시 17분. 8시간 동안 눈 속을 어정대고 있어야 오후 6시 16분 승부역에서 동대구역으로 가는 열차를 탈 수 있다. 도착은 밤 10시 8분.

눈길 삼십 리를 걷는 데는 채비가 단단해야 한다. 모자가 달린 다운파카는 물론이고 아이젠과 스틱, 모장갑과 선글라스 그리고 눈 위에 앉을 깔개까지도 필수다. 등산장비 함에서 오만 것들을 꺼내 륙색에 담고 있으니 아내가 "또 어딜 가요"한다. "눈길 삼십 리 행군"이라 했더니 구미가 동하는 모양이다. "나는 가면 안 돼요." "그러면 당신 것도 챙겨요." 일행이 세 사람으로 늘어났다.

달리는 새벽열차 속에서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을 생각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설국의 첫 문장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새어 나왔다.

눈속의 나, 영화속의 주인공처럼 황홀

석포역에서 승부역으로 가는 강변 눈길은 영화 속 풍경처럼 정말 환상적이다. 바람은 맵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라이트블루의 하늘. 그 아래 도화 연필로 그린 듯한 눈 덮인 산들의 스카이라인. 하얀 강바닥에 뻥 뚫린 시커먼 얼음 숨구멍. 이렇게 아름다운 백색 향연에 손님으로 초대 받다니. 오! 하나님, 정말.

눈길은 생각보다 미끄럽지 않았다. 의사 지바고가 연인 라라를 찾아가던 시베리아 눈길이 환영처럼 눈에 어른대기 시작하자 이 눈길이 끝나는 지점에 내 목숨도 다하여 영원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방정맞은 생각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이 길은 온갖 동영상이 제멋대로 상영되는 '영화의 눈길'인가. 필름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 돌아갔다.

소나무 숲이 바람을 막아주는 양지녘에 털썩 주저앉았다. 술 한 잔 마시지 않고는 이 벅찬 감격, 하얀 세상에 은총과 같이 밀려오는 감동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잭 다니엘이란 위스키 한 컵을 스님들의 밥그릇인 발우에 따르고 코카콜라 한 캔을 부었다. "얼음이 없잖아." 젊은 여인의 속살과 같은 흰 눈 한 줌을 집어 흩뿌렸더니 멋진 버번 콕(bourbon coke)이 칵테일 되어 나왔다.

아름다운 설경에 오직 감사할 따름

우린 걷다가 쉴 때마다 '눈 탄 눈 술'을 마셨다. 그러면서 이 멋진 경치 속에 우리를 풍경의 일부가 되게 해 준 어떤 큰 힘이 저 높은 곳에 있을 것 같아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두 시간을 걷고 나니 점심때가 훨씬 지나 있었다. 마침 길가 빈집 마당에 자리를 펴고 제대로 된 술상을 차렸다. 족발과 김치만 있어도 한상 가득한데 뜨거운 코펠이 가운데 정좌하고 나니 그야말로 술맛 나는 세상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출출한 뱃속에 라면 한 젓가락 후루룩 빨아 넣고 국물 한 술 떠먹고 나니 흰 눈이 도배한 하얀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슬람은 돼지고기를 금하고 라마단 기간 중엔 금식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돼지족발을 제상에 올려두고 앞산 위의 푸른 하늘을 향해 다시 한 번 감사의 예를 올렸다. 댕큐, 오 나의 하나님.(thank you, oh my god.)

수필가 9hwal@hanmail.net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