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가릴 것 없이 사람 사는 세상에는 성과 고향이 같거나 같은 학교를 다닌 사람끼리 함께 모여 정을 나누고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연고주의'가 존재한다. 민주주의의 요람이라고도 하는 미국에서조차 카터 대통령의 조지아 사단, 클린턴의 아칸소 사단, 오바마의 시카고 사단이 정부 고위직을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과 일본도 연고주의가 매우 강한 나라에 속하지만 혈연, 지연, 학연 등 이른바 '3연(緣)'이 가장 끈끈한 나라는 단연코 한국이다. ○○향우회, ○○교우회, ○○전우회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결속력 있는 연고 조직으로 소문이 났지만, 전국 각지에 있는 화수회, 향우회, 동창회 등의 수는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특히 대구경북은 다른 지역에 비해 혈연, 지연, 학연 등 3연이 세기로 정평이 나 있다. 사회생활에 접어드는 순간부터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3연의 굴레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우리 국민들이 이처럼 연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사회적 격변과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잃어버린 전통적 가치관을 대신할 새로운 사회 통합의 원리를 찾지 못한 때문이다. 또 외로움과 소외에서 벗어나 보호받고 싶은 인간 본능의 발로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계망'과 '연줄망'은 모두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사회적 네트워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연계망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사회적 순기능을 하는 네트워크라면 연줄망은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특정 계층과 집단에게만 허용된 폐쇄적 관계의 네트워크라 할 수 있다. 혈연, 지연, 학연은 좋게 표현하면 '연계망'이고 '인적 네트워크'이지만, 실제로는 공적 네트워크인 '연계망'의 경계를 넘나들며 의사결정을 왜곡시키고 각종 비효율과 비리의 온상을 만들어내는 '연줄망'이나 다름없다.
한국인의 유전인자와도 같은 끈질긴 3연이 때로는 순기능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나 선택을 마비시키고 소외감을 증폭시켜 사회적 갈등의 불씨가 되는 수가 많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올해 한국의 투명성지수(CPI)는 세계 178개국 중 39위에 그쳤다. 투명성의 저하는 결국 국가경쟁력을 갉아먹게 된다. 우리나라의 낮은 투명성의 이면에는 3연에 의한 연고주의도 분명코 한몫을 했을 것이다.
대구경북은 역사의 고비마다 나라를 구하고 새 길을 여는 역할을 해 왔다. 히딩크의 리더십이 한국 축구계의 고질적인 학연의 고리를 끊고 월드컵 4강 신화를 달성했듯이 이제 불명예스런 3연의 질곡에서 벗어나, 보다 건강하고 투명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대열에 지역민들이 앞장설 때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화수회, 향우회, 동창회를 하루아침에 없앨 수도 없거니와 문화와 전통으로 이어져온 뿌리 깊은 연고주의를 단기간에 불식시키긴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화수회, 향우회, 동창회와 같은 '연줄망' 조직들의 역기능을 줄여나가되 순기능을 더욱 북돋우는 한편, 3연에 얽매이고 닫힌 네트워크인 '연줄망' 사회에서 시민사회를 향해 열린 네트워크인 '연계망' 사회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단순히 회원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모교 발전을 위해 기부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후배들에게 장학금과 멘토 서비스를 제공하는 동창회, 고향의 마을 어른들을 찾아뵙고 고향 농산물 사주기와 고향 방문 운동을 통해 참다운 애향심을 발휘하는 향우회, 이러한 순기능의 동창회와 향우회로 거듭날 때 비로소 이들 모임의 존재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하고 회원들의 보람과 자부심도 배가될 것이다.
우리 가문, 우리 고향, 우리 모교가 출세한 사람들을 많이 배출했음을 자랑하기보다 기부와 사회봉사, 공공의 이익을 위해 기여한 인재들을 자랑으로 삼는 풍토로 바뀌어야 한다.
미국의 경우 서로 간의 신뢰 부족으로 인한 거래비용이 GDP의 45%나 된다고 한다. 저신뢰사회로 꼽히는 한국이 경쟁력 있는 고신뢰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가문, 지역, 출신학교의 울타리를 넘어 상호협력, 호혜, 배려, 자원봉사를 실천하는 시민들로 이루어진 수평적 네트워크를 더욱 확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취미, 문화, 역사, 환경보호, 자원봉사 등을 목적으로 한 양심적인 지도자가 이끄는 시민단체가 더 많이 생겨나고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가꾸어나가야 할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제국이 천 년 동안 번영할 수 있었던 이유로 개방성과 다양성을 꼽고 있다. 대구경북도 비록 산업기반이 미약하고 입지 면에서도 불리하지만 혈연, 지연, 학연의 굴레에서 벗어나 열린 사고로 다양성을 추구할 때 글로벌 무대의 승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껏 우리끼리만 썼던 '우리가 남이가'는 말을 이젠 밖을 향해 당당하게 외칠 때가 되었다.
하춘수(대구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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