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窓)'
매일신문사 중부지역본부가 제564돌 한글날을 맞아 지난달 9~31일까지 주관한 '제23회 매일 한글 글짓기 공모전'에는 운문 608점, 산문 196점 등 총 804점의 수준 높은 작품들이 응모해 모두 88편이 당선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가을 빛' '하늘' '마음' '강가에서' '창(窓)' 등 운문·산문 공통 글제로 치러진 이번 공모전은 전체 대상(1명)과 각 부문별 장원(1명), 차상(2명), 차하(3명), 장려(5명)상이 선정됐습니다.
창(窓)
김민정 경산여중 2학년
아마 한글날 때쯤이었던 것 같다. 텔레비전에서 '말모이 사전'에 관한 프로그램을 봤었다. '말을 모은 사전'이라는 뜻인 말모이 사전은 일제 치하에서 온 국민이 참여해 만든 사전으로, 자그마치 13년이나 걸린 대업의 결과다. 말모이 사전 편찬을 이끈 사람은 조선어학회 회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높임으로써 궁극적으로 민중 봉기를 통해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 결사'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의해 29명이 구속 투옥되고, 2명은 모진 고문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출판을 눈앞에 두고 있던 말모이 사전의 원고는 일본인에 의해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는데 그로부터 3년 후, 경성역 창고에서 낡은 원고가 발견되어 비로소 출판될 수 있었다. 현존하는 약 3천 개의 언어 중 고유 사전을 가지고 있는 언어는 20여 개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그 20여개의 언어에 한글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선조들은 목숨을 걸고 우리의 얼인 '한글'을 지켜 냈다.
그런데, 21세기의 우리는 우리말을 지켜내기는커녕 오히려 깎아내리고 있다. 많은 청소년들이 세종대왕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머리칼을 짧게 깎아버리고 턱에 매달려 수염을 깎아낸다. 정말이지 할 말이 없는 풍경이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진풍경이랄까?
영어를 예로 들어 보자.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영어로 도배된 옷을 자랑스레 입고 다니는 사람들, 한국말 더듬거리는 외국인을 보면 '그래도 한국말 잘 한다'며 얼굴에 미소까지 띄우다가 영어 못하는 한국 사람을 보면 '뭐야, 발음이 왜 그렇게 더러워?'라며 비판하는 사람들, 순우리말은 촌스럽다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 '글로벌 시대'라는 명목 하에, 해외 수출을 위해 영어로 된 상표를 내건 한국 회사들, 길거리를 걷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외국어로 된 간판들, 한글로 해도 될 말을 굳이 외국어로 바꿔 쓰고 그렇게 해서 유식하게 보이려 하는 속이 텅 빈 사람들, 볼수록 가관인 신조어들, 인터넷 용어들, 청소년들의 축약어, '십장생'을 욕으로 바꾸어버린 무서운 사람들…….
과거, 한글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바쳤던 조상들의 피와 땀과 눈물은 아는지 모르는지, 한글을 바르게 쓰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글로벌이라는 가면을 쓰고, 그것의 참뜻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우리 것'을 잃어만 가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말은 우리 민족을 비춰 주는 '창(窓)'과도 같다. 창이 흐려지면 창 안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우리 민족의 얼도 흐려지게 된다. 우리의 본모습을 보지 못하고, 동시에 근본 뿌리를 잃어버리는 셈이다. '불휘 깊은 남간 바람에 아니 뮐세'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라 생각한다. 21세기, '글로벌 시대'에서 중요한 것은 외래문화가 최고라며 무조건 받아들이는 자세가 아니다. 세계에 '한국'을 어필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근본 뿌리가 튼튼해야 하며,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바르게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깨끗한 창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창문을 더럽혔던 외세들……. 그들의 기분 나쁜 숨결이 닿아 하얗게 김이 서려버린 우리의 창을 자신의 영혼으로 깨끗이 닦은 수많은 선조들을 위해서라도, 한글을 소중히 사용했으면 좋겠다.
난 가끔씩, '내 이름이 순우리말로 된 이름이면 좋을텐데.'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엔 순우리말로 된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 이슬, 하늘, 해찬솔, 가온, 누리, 샛별, 바다, 아름…….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 해 한 해를 거듭할 때 마다, 순우리말로 된 이름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 자꾸만 부러워진다.
세상 모든 것을 모나지 않게 따뜻이 품고 있는 우리의 스물여덟 자가, 다른 나라 말들을 배우면 배울수록 너무나 아름다워 보인다. 한글은 세계 공용어가 될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어로 표현할 수 있는 추상적 개념의 한계점을 뛰어넘은 훌륭한 한글이 자랑스럽고, 한글이 있기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
최근 한국어 시험을 보는 외국인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만큼 한글이 많이 알려진 것이다. 한민족을 보여 주는 창인 한글, 그것을 깨끗이 닦는 일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만이 할 수 있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일 것이다.
말과 글을 잃으면 민족도 멸망한다. -주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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