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원태의 시와 함께] 파이프오르간 / 서영처

입력 2010-11-25 07:41:49

저 길고 짧은 길들 잔뜩 하늘로 매단 악기는

한 그루 실한 나무다

물관 체관으로 양분을 빨아

푸르디푸른 잎사귀 천정으로 피워올린다

열 손가락 발가락 닮은 페달이

노 젓듯 부지런히 흙 속을 파고든다

바람은 몸 깊숙이 박힌 관(管)을 휘저으며

육신의 동굴마다 박쥐들을 깨워 날려 보낸다

상하수도와 가스관, 통신케이블 관

누군가 지하에게 불어넣는 숨소리로 도시가 울고 있다

묘지마다 부풀어 오른 봉분들의 긴장

달리는 자동차 우는 아이들 굴착기의 굉음,

빌딩의 막대그래프가 춤추며 출력을 그려낸다

파이프오르간이다

아픈 짐승들처럼 먹구름 몰려오고

고층아파트는 오디오 스피커처럼 늘어서서

하모니를 뿜어낸다

도시의 거대한 뿌리,

지하철이 철컥철컥 옥문을 잠그며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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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하나의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에 비유하고 있다. 파이프오르간의 이미지는 '한 그루 실한 나무'로 치환되었다가, '흙 속을 파고들'거나 '박쥐들을 날려 보내는' 동물적 역동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결국 이 모두는 '몸 깊숙이' 혈관처럼 파이프들을 탑재한 저 울울한 빌딩들의 숲을 빗댄 것이다.

영성의 소리요 천상의 화음이라는 파이프오르간의 이미지는, 그러나 우리들의 도시에서는 전혀 달리 암울하게 그려진다. 도시가 내장한 파이프들은 컴컴한 동굴 같아서 박쥐를 날려 보내고, 음울한 지하의 숨소리로 울고 있거나, 온갖 굉음으로 가공할 "출력을 그려낼" 뿐이다. '하모니'라 해봐야 기껏 "오디오 스피커처럼 늘어선" 고층아파트들에서 배설하듯 '뿜어내'지는 것들뿐인 셈이다. 지하철은 도시의 거대한 뿌리이자 감옥들이라는 전언이 어둡고 우울하다. 파이프오르간에 빗댄 도시에 대한 문명비판적 상상력을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로 보여주고 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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