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곧 하늘" 교리로 東學 창시, 봉건적 신분질서에 반기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1824~1864)는 차별과 불평등 사회에 '사람이 곧 하늘이다'며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주창하고,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을 가르쳤다.
인내천 사상은 반상이 엄연히 구분된 조선왕조의 기존 사상과는 확연히 단절되는 혁명적 사상으로, 새로운 질서를 꿈꾸는 민중들로부터 호응을 얻게 됐다.
인간평등관을 실천한 수운의 사상은 2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후손들의 가슴속에 도도히 스며들어 흐르고 있다. 수운의 행적과 유적을 보존·관리하고, 자원화해 그의 사상을 후손들에게 오롯이 전승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수운의 생애와 사상
수운의 어릴 적 이름은 복술(福述)이었다. 이후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의지로 이름을 스스로 제우(濟愚)로 정했다.
경주 최씨로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서 가난한 양반가의 선비인 아버지 최욱과 재가녀 한(韓) 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적서 차별이 엄연했던 당시 서자인 그는 관직을 갖기 힘들었다. 여기다 여섯 살 때 생모가 죽고, 17세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떴다. 3년 상을 치른 수운은 유랑 길에 올라 갖가지 장사와 복술 등에 관심을 가졌으나 세상의 어지러움에 구도의 길로 들어선다. 팔도를 돌아다니던 그는 1859년 처자를 거느리고 경주로 돌아와 수련생활을 이어갔으며 이듬해 봄에 천주강림의 도를 깨닫고 동학을 창설한다.
그가 하늘님께 계시를 받은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은 '나의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니 내 안에 하늘님을 모셨다'는 뜻으로 시천주(侍天主) 사상이 여기에서 나온다.
"수운 대신사는 포덕하면서 노비를 며느리와 양녀로 삼아 인간평등관을 실천했습니다."
박남정(68) 용담정 수도원장은 "대신사께서는 사람의 생명체가 형성될 때 본래 하늘님 마음을 받았기에 모든 존재에서 본성은 같고 모든 사람은 근원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동학은 수운의 사후 후계자인 제자 최시형에 의해 교세가 전국적으로 확산됐는데, 동학은 순수하게 이 땅에서 꽃핀 조선인의 순정한 종교이며, 주체적인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열어 전봉준의 갑오동학대혁명과 3대 천도교주 손병희가 주축이 된 3·1운동으로 꽃을 피웠다.
현재 수운이 태어난 생가는 남아있지 않지만, 그 터에 이를 기념하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유허지에서 길 건너 구미산 중턱을 바라보면 눈에 띄는 묘역이 바로 수운의 묘이며, 천도교에서는 태묘라고 부른다.
비교적 단출한 묘역에는 상석과 석인상, 그리고 '동학 창도주 수운 최제우 스승님 묘'라고 한글로 쓴 묘비가 있다.
▶천도교 발상지, 용담정
한 시대를 풍미한 종교가 발생한 성지답게 구미산 자락으로 둘러싸인 용담정 일대는 신성한 기운이 짙게 감돌았다.
경주시내에서 서쪽으로 달리다 현곡면 가정리 용담정으로 들어서면 구미산이 능선을 펼치고 있다. 542m의 비교적 높지 않은 산세가 가파르게 형성돼 심산의 느낌을 주고 있다. 바로 수운이 태어나고 뼈를 묻은 곳이다.
용담정은 그의 아버지 최옥이 글을 가르치던 곳이며, 최제우가 천도교를 창시한 뒤 포교활동을 하며 '용담유사'를 쓴 곳이기도 하다. 천도교의 발상지인 셈이다.
용담정은 수운이 1860년부터 여섯달 동안 한울님과 문답을 한 곳이라고 한다. 수운은 이 문답을 통해 천지우주간의 보편 근원적 진리인 무극대도를 받아서 인류사회에 포덕을 시작함으로써 후천의 새로운 세계를 전개하게 된 첫걸음을 열었다.
천도교 수도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용담정 건물은 수운이 머물렀던 자리가 아니고 1975년에 지어진 것이다. 기이한 봉우리와 괴석들로 장관을 이룬 구미산 아래 용추의 맑은 못이 흐르는 용담은 눈이 시릴 정도다. 알을 품은 형상이라 전해지는 이곳의 지세는 한 선지자의 탄생을 기다려온 것 같다.
수운이 득도 후 최초로 쓴 가사체의 '용담가'에는 "기이하고 장대하다 기이하고 장대하다 이내 운수 기이하고 장대하다"는 득도의 과정과 기쁨을 표현하였는데, 용담의 지세가 뛰어남을 먼저 서술하고 있다.
▶수운 순교지, 대구 관덕정
태어남과 죽음을 중시하지 않는 천도교에서 수운의 기록은 크게 남아 있지 않다.
동학교주 최제우는 1863년 동학을 일으켜 백성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사상범 취급을 받아 경주 용담정에서 선전관 정운귀에게 체포돼 대구 감영에 갇혔다.
수운을 체포한 정운귀 일행은 대구와 상주 보은을 거쳐 경기도 과천에 이르렀다가 철종의 붕어로 1864년 1월 대구로 되돌아와 그해 3월 관덕당(觀德堂·관덕정) 아래에서 수운을 참수했다.
수운은 동학을 포교하다 심문을 당할 때 서학(西學)의 도가 아니냐는 물음에 "내가 주장하는 도는 천도(天道)다. 동에서 일어나 동에서 배우니 동학(東學)이라면 몰라도 서학이란 가당치도 않다"고 해서 동학이란 말이 생겨났다. 그의 주검은 용담정 북동쪽 1㎞ 되는 산등성이에 묻혔다.
지금의 대구 동아쇼핑 뒤쪽, 문화아파트 자리에 관덕당이 있었다.
관덕정은 1749년 조선시대 무과의 하나인 도시(都試)를 행하던 도시청(都試廳)이었고, 관덕정 앞으로는 과거를 보던 일종의 연병장이 있었다. 평상시에는 훈련장으로 사용했으나 이따금 국사범을 공개 처형하는 곳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을해박해(1815년), 정해박해(1827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 때 천주교인 25명이 이곳에서 처형됐으며, 대구의 경상감영 옥사에서 순교한 이들도 31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 뒤 지금의 적십자병원 뒤쪽에 있는 관덕정 자리로 옮겼고, 원 자리에는 염매시장과 떡전이 들어섰다.
지금의 관덕정은 남장대와 합해 놓은 건물로, 천주교 대구대교구에서 세웠다.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맞아 성지개발사업으로 1983년부터 부지를 매입한 뒤 1991년 개관했다. 이곳에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로 순교한 신자들 가운데 성인으로 추대된 이윤일의 유해가 봉안됐다.
경주·이채수기자 csl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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