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역사 110년, 한국이 달려왔던 길은…

입력 2010-09-30 08:16:44

▨고종 캐딜락을 타다/전영선 지음/인물과 사상사 펴냄

한국의 자동차 역사 110년. 한국 근대사에서 자동차는 어떤 모습으로 등장했고 어떻게 한국 산업과 민중의 생활을 변화시켰을까. 1899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 자동차 110년의 역사를 담아낸 책이 나왔다.

자동차는 우리나라에 요란하고 충격적인 모습으로 등장했다. 처음 전차 8대가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저절로 움직이는 쇠당나귀' '쇠귀신'이라고 불렀다. 자동차는 개화의 상징인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전차의 전깃줄이 번갯불을 튀겨 가뭄이 들고 벼락을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전철에 익숙해지자 전철을 타보기 위해 '계'를 붓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자식들은 연로하신 부모님을 전차에 태워드리기 위해 '효도 전차계'를 들었고 시골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전차를 한 번 타기라도 하면 그 집 사랑방은 전차 이야기로 불이 꺼지지 않았다.

1915년부터 자동차가 급속히 늘면서 운전수가 귀해지자 운전수는 학부를 졸업한 고등 관리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았다. 관리들 월급이 30, 40원이던 시절 운전수들은 50, 60원을 받았고, 손님이 주는 팁까지 합하면 아무리 못 벌어도 월급이 100원을 넘었다.

'쇠당나귀'는 다리로 걷고 소와 말을 타고 다니던 기존의 운송방식을 뒤집으며 천지를 개벽시켰다. 1906년 사람들은 그때까지 익숙하던 '우측보행'을 버리고 '좌측통행'을 해야 했을 때 사람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전차에 치여 아이가 죽는 사고가 발생하자 분노한 시민들이 전차와 운전수를 공격하기도 했다.

시내버스가 가장 먼저 생긴 곳은 대구로, 1920년 7월이었다. 호텔을 경영하던 일본인이 호텔 고객의 교통 편의를 위해 개인적으로 영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관청에서 운영하는 시내버스는 1928년 서울(4월)과 대구(12월)에 최초로 등장했다. 시내버스의 등장과 함께 '버스 걸'은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오라이, 스톱'을 외치는 여차장들은 흠모의 대상이 됐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자동차 업계는 활기를 맞이했다. 전쟁통에 쏟아져 나온 군용폐차를 불하받아 망치로 두들겨 펴고 용접기로 기워서 만든 재생 자동차였다. 부서진 군용차 부속품과 드럼통, 용접기, 망치만으로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모습에 미군들은 혀를 내둘렀다.

흔히 '자동찬 산업' 하면 정주영을 떠올리지만 불굴의 기업가로 기아자동차 창업주 김철호를 빼놓을 수 없다. 1906년 경북 칠곡군에서 태어난 그는 맨몸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자동차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벌어 한국에서 자동차 산업을 일으켰다. 김철호는 1952년 최초의 국산 자전거 '삼천리'호를 만들었고, 새나라 자동차가 나오기 전인 1962년 1월 세 발 미니트럭 K-360을 생산했다. 1967년 T-2000이라는 중형 삼륜트럭, 1971년 중형 사륜트럭 타이탄 등을 잇달아 생산하며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했다. 1973년 68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맨주먹으로 오늘의 기아산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나라와 내 민족의 덕이다. 나라의 국력이 신장되지 않으면 아무 사업도 할 수 없다"는 유언을 남겼다.

현대의 정주영, 엔진도사 함경도 아바이 김영삼, 드럼통을 펴서 국산 버스를 만들어 수출까지 한 하동환, 양키트럭을 개조해 마이크로버스와 승용차를 만든 김창원 등은 한국 자동차 신화를 쓴 인물들이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1997년 외환 위기 때 충격타를 맞았다. 그러나 자동차 회사들의 피나는 구조조정으로 국내 자동차 업계의 연간 생산대수는 2000년 말 처음으로 300만 대를 돌파했다. 2003년 358만 대 생산에 183만 대 수출이라는 사상 최대의 호황을 맞아 자동차 수출 5위국으로 성장했다.

자동차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110년, 운전면허증을 가진 사람은 2천590만 명, 자동차 총 보유대수는 1천740만 대로 3명당 1대꼴이다. 망치로 주름진 철판을 펴고, 용접기로 기워서 자동차를 만들던 나라가 자동차 대국이 된 것이다. 404쪽, 1만5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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