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석 자 겨우 쓸 무렵부터 아버지는 나에게 붓글씨를 가르쳤다. 그 시간만큼은 호랑이 훈장처럼 아주 엄하셔서 '진짜 아버지 맞나?'며 속으로는 의심도 했었다. 그런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학교에 가서도 다른 아이들보다 글씨 예쁘게 잘 쓴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요즘에는 컴퓨터 키보드만 두드리면 원하는 글자체와 글자 크기, 색깔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땐 손수 쓰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가끔 선생님께서 내 공책을 펼쳐 들고는 "이 친구 쓴 것 좀 봐? 너희들도 이렇게 예쁘게 쓰도록 하자"라고 하셔서 머쓱해지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만으로 연애편지를 대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공부는 좀 뒤떨어지던 우리 반의 P는 이틀에 한 번씩 대필을 부탁해 왔다. 그런 입장이 미안했던지 채 익지도 않은 풋과일을 가져와 다른 아이들 몰래 내 책가방에 넣어 주곤 했다. 시험 공부를 해야 할 때도 그 아이는 대필을 부탁해 왔고 한 술 더 떠서 아예 처음과 끝부분의 마무리를 내가 알아서 쓰라고 했다. 특별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고 슬슬 짜증이 났다. 처음엔 내가 생각나는 대로 쓰다가 언제부턴지는 모르지만 낡아서 너덜너덜해진 시집 몇 권을 뒤적이며 예쁜 문장들을 뽑아와서 패러디하기 시작했다. '우리 만나 기분 좋은 날은 강변을 거닐어도 좋고 돌담길을 걸어도 좋고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어도 좋았어. 이세상이 온통 우리를 위하여 축제라도 열어 놓은 듯 했지. 하늘엔 폭죽을 쏘아 놓은 듯 별빛이 가득하고 불어오는 바람도 우리들을 위한 사랑의 사인 같았어. 우리는 무슨 말을 해도 웃고 또 웃기만 했지. 모든 꽃은 시들지만 내 마음 속에 핀 너에 대한 사랑의 꽃은 천 년이 지나도 시들지 않아.'
생각해보면 귀찮고 부담스러워서 싫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아이로서는 '해가 뜨는 것도 달이 뜨는 것도 그 남자친구 때문'이라고 생각할 만큼 대단한 존재였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써 주곤 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으며 허황한 이야기를 써댔지만 그 아이는 내 마음도 모른 채 뛸 듯이 좋아했다.
시험 공부를 미뤄 둔 채 남의 연애편지 대필해 주며 허덕인 시간들이 세월이 흐른 지금에 생각해 보니 나의 글쓰기에 든든한 디딤돌이 된 것 같다. '돌에 걸려 넘어지면 걸림돌이 되지만 그 돌을 딛고 일어서면 디딤돌이 된다'는 말처럼 마구 써준 그때 그 편지가 P에게는 걸림돌이었는지 디딤돌이었는지….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이 몰려온다.
서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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