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창] '유토피아'에서의 의료

입력 2010-09-20 07:17:02

요즈음 진료를 하면서 곤욕을 치르는 일이 있다. '암환자 산정 특례' 지원기준이 강화됨으로 기존에 혜택을 받던 환자분들에게 계속 혜택을 받도록 해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친분을 맺어왔던 환자분들과 얼굴까지 붉히면서 옥신각신하기도 한다.

문득 '유토피아'에서의 의료는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토피아'는 헨리 8세의 왕위계승법에 반대하여 사형을 당할 때 집행인에게 "내 목은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라는 농담을 하며 최후를 마친 토머스 모어(Thomas More)가 쓴 책으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理想鄕)의 나라다.

'유토피아'에서는 공유제도이기 때문에 돈이 필요 없다. 책을 쓸 당시 영국에는 병원이 하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에서는 네 개나 있다. 의료시설이 완전히 갖추어져 있고 간호사는 친절하고 성실하다. 경험 많은 의사가 환자들을 잘 돌봐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집에서 앓기보다는 입원해서 앓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학서를 매우 귀중하게 여기고 의학을 매우 존중한다.

흥미로운 점은 안락사를 허용하고 자살을 경멸한다는 점이다. 환자가 생기면 극진히 보살펴주며 회복에 좋다고 생각되는 약이나 음식은 무엇이나 제공해 준다. 불치병에 걸린 환자에게는 간호사가 옆에 붙어 앉아 즐겁게 해주며 증상을 제거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해준다. 극심한 고통을 일으키는 불치병이면 안락사를 허용한다. 스스로 굶어죽거나 또는 수면제를 먹고 죽는다. 공인된 안락사는 명예로운 죽음으로 생각한다. 신부의 허락 없이 자살을 하면 매장이나 화장을 해주지 않으며 시체를 연못에 던져버린다.

그렇다. 우리나라 국민이 요구하는 의료제도의 최종 목표는 '유토피아'에서처럼 돈을 내지 않으면서 최대의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것일 것이다. 의료인들의 최종 목표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돈을 벌면서 최선의 의료 행위를 하는 것일 것이다. 돈 문제만 제외하면 환자와 의료인의 최종 목표는 같다. 유토피아에서는 돈이 필요 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국가로 의료인들도 돈을 받지 않고는 의료서비스를 해 주지 않는다. 국가가 환자 대신 일부 의료비를 제공하려고 하나 한계가 있다. 그래서 '산정 특례'의 기준을 높여 국가가 지원하는 환자의 숫자를 줄이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또 내일부터 산정 특례를 '해 달라' '해 줄 수 없다'는 말로 환자분들과 옥신각신해야 할 것이다. '감사하다'라는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면서 고구마 한 상자를 진료실 구석에 놓고 황급히 문을 열고 나갔던 그들과 말이다.

임만빈<계명대 동산의료원 신경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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