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사람의 향기

입력 2010-09-03 07:35:35

유럽 여행 때다. 런던공항에 내려 입국수속을 하려고 제일 짧은 줄을 골라 뒤에 붙어 섰다. 갑자기 고약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둘러보니 앞에 부부로 보이는 흑인 남녀가 서 있었다. 윤이 나도록 반짝이는 검은 피부에 곱슬머리를 곱게 땋고 옷은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속이 울렁거리며 구토가 났다. 그만큼 냄새는 형용할 수 없이 고약했다. 그 민족에게서 나는 특유의 체취인 것 같았다.

각 민족에게는 몸에서 풍겨 나오는 특이한 냄새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생활 환경, 특히 먹는 음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민족마다 식생활에 차이가 있고 즐겨 쓰는 향신료가 따로 있으니 그것이 몸에 배었다가 풍겨 나오면서 낯선 코를 자극하는 것일 게다.

냄새를 분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다. 우리가 향수를 느끼며 즐겨먹는 청국장을 어느 나라 사람이 구수한 맛이라고 하겠는가. 악취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몸을 사렸다. 혹시 나에게도 된장 냄새, 김치 냄새가 진동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외국인들이 우리에게서 나는 마늘 냄새에 질색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비단 음식뿐이겠는가.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처럼 자신에게서 풍기는 분위기와 체취에도 일말의 책임이 따른다고 해도 좋을 성싶다. 긍정적인 생각과 건전한 생활방식, 온화한 표정 관리, 청결 등 절제 있는 삶에서 배어나오는 품위는 몸에서 나는 악취를 어느 정도는 상쇄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딸이 향수 한 병을 건네준다. 스스로 향기를 뿜어낼 나이를 넘겼으니 이제 조금씩 사용해 보란다. 나는 원래 향수를 쓰지 않는다. 뭔가에 의지해서 포장을 하는 것이 본질을 왜곡하는 불순행위 같아서다. 그러나 어쩌랴. 나이를 먹으면 신진대사가 느려져 스스로 정제되지 않은 불순물이 체내에 쌓이면서 체취가 되어 배어 나온다는 것을. 청결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에 뭔가의 도움을 받아 나를 덧씌운다는 것, 빳빳하게 세우고 있던 어깨 한쪽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향수병을 받아 쥐었다. 장미향을 뿌린들 무엇을 얼마나 가릴 수 있겠는가. 삶에 찌든 나의 체취와 향수가 몸을 섞어 혹여 알 수 없는 고약한 냄새를 만들어 내지는 않을까. 조그만 유리병에 든 노란 액체에 선뜻 친근감이 가지 않지만 조심스럽게 사용해 보기로 했다. 예(禮)와 덕(德)으로 인격을 다듬고 거기에 향수의 도움을 받으면 한 단계 격조 높은 체취를 연출할 수도 있지 않을까. 힘이 잔뜩 들어간 어깨를 낮추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도 자기의 실체를 인정하는 겸손이자 융통성이란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수필가 박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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