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미국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했다면 사용했을까?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수두룩하다. 일본이 원폭 개발을 검토하기 시작한 시점은 1940년 4월이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아인슈타인의 편지를 받고 원폭 개발을 결정한 1939년 10월과 6개월밖에 차이가 안 난다. 원폭 개발은 육군 항공대와 해군 두 갈래로 진행됐다. 육군 쪽은 '일본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 니시나 요시오(仁科芳雄'1890~1951)가, 해군 쪽은 1903년에 양성자의 존재를 예언한 나가오카 한타로(長岡半太郞'1865~1950)가 주도했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원폭 제조는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때가 1943년이었다.
그러나 우라늄 235의 확보가 어려웠다. 설사 충분한 양을 얻었다 해도 원폭 제조가 가능한 수준으로 정제하기 위해서는 연간 전력 생산량의 10%가 필요했다. 그렇게 되면 다른 무기 생산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자금도 부족했다. 또 연구자들은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원폭 제조에 10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미국도 당분간은 원폭 제조가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판단에 따라 일본은 1945년 6월 개발을 중단했다.
그러나 일본은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폭 '리틀보이'를 투하하자 일본 정부는 니시나 요시오를 비밀리에 불러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이 진짜 핵폭탄인지, 만약 그렇다면 6개월 내에 똑같은 폭탄을 만들 수 있는지 물어봤다. 미국은 마치 이를 알았다는 듯이 사흘 뒤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했다.
지난 6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열린 '원폭 희생자 위령제 및 기념식'에 미국 대표로는 처음 참석한 존 루스 주일대사의 '침묵'에 대해 일본 내에서 말이 많다. "미국 내에 원폭 투하 정당론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공식적인 발언 없이 떠난 것은 유감"이라는 것이다. 원폭 투하에 대한 사과를 기대했으나 루스 대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유감을 갖기에 앞서 자신도 원폭을 가졌으면 사용했을 것이라는 '불편한 진실'에 먼저 눈을 떠야 한다. 원폭 투하에 대한 일본인의 접근 태도는 매우 이기적이다. 피해자 이미지만 재생산하고 있을 뿐 비극의 원인 제공자가 자신이란 사실은 외면해왔다. 루스 대사의 침묵에 대한 일본의 불편한 심경에 공감이 가지 않는 이유다.
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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